시립희망원, 내가 이 직책을 맡은 지도 엊그제 같다. 방금 방문을 열고『원장님! 결재서류 총무과에 전해주고 왔습니다』하는 사동 아이의 소리를 들으며 문득 과거 나의 사동 시절을 생각해 본다. 25살에 사동 노릇을 한 나, 그것도 대구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내 고향 성주 고을 면사무소에서 나는 내 또래인 내 학교 친구들이 모두 서기로 일할 때「이군」으로 불리면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해냈다.
지지리 가난했던 우리집. 농사는 불과 몇 마지기 안 되는 소작인데 식구는 열일곱이었다. 어머니가 셋이었기 때문이다.
첫째 어머니는 젊어 돌아가시고 둘째 어머닌 딸만 넷 낳았다가 겨우 나와 내 아우를 낳으셨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들을 봐야겠다고 작은 어머니를 얻어 거기서도 4남 1녀 정말 옛날이니까 통했지 지금이야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장리곡식 얻으러 다니시랴 정신 없었고 그나마 하도 얻어내는 바람에 신용을 잃어 주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강변에 남이 널어놓은 벼를 걷어 가면 거기 떨어져 있는 낟알을 주워다 나물을 섞어 죽을 끓여 먹고 어떨 땐 쪽박을 들고 실지로 구걸도 했다. 하루는 엄마를 따라 내 이복 동생과 밥을 구하여 돌아오는데 갑작스런 소나기로 냇물이 불어 급류를 건너게 됐다. 그런데 그만 그 얻어온 밥을 놓치게 됐다.『엄마! 밥. 엄마 밥 떠내려 간다 바압』난 급류에 떠내려가면서도 밥 못 먹게 된 게 몹시도 분했었다.
지금이야 국민학교가 의무교육이니까 돈 없어도 다닐 수 있지만 그땐 입학시험도 있고 월사금도 있었다. 난 학교 들어가기 전에 머리가 과히 나쁘진 않았던지 틈틈이 어깨 너머로 공부한 것이 천자문 명심보감 그리고 논어까지 읽을 실력은 돼 2학년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입학금도 옷도 학용품도 없어 뒷산에 올라가 학교 가는 친구를 보며 여러 번 울었다. 그 이듬해 다시 2학년 시험에 또 합격했다. 그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난 벽진면의 이 면장을 찾아가 호소를 했다.『공부가 하고 싶어 죽겠심더. 도와 주이소. 학교 가서 공부할 수 없겠능교』애걸하는 나를 한참 보시던 면장님은 그 자리에서 입학금과 월사금을 전담해 주기로 하셨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분 덕택에 난 공부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것도 4학년에 중퇴하고 말았다. 끼니도 못 잇는 주제에 공부가 뭐냐는 형제들의 투덜거림과 이 면장과의 약속 이행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학교를 중단한 나는 서울로 무단 가출을 했다. 엿을 꼬는 집이었다. 친구의 꾐으로 공덕동 엿집이었는데 그나마 14살 어린 나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마침 성주 고을 사람이 있어 겨우 엿장사가 됐다.
그때부터 엿장사로서의 설움이 시작됐다. 그러나 그것도 아버지의 호출로 못하고 고향에 왔다. 여전히 끼니 잇기도 어려웠지만 그때 곧 집안을 일으킬 기회가 생겼다. 가마니 짜기였다. 하루 17장씩 짜내는 노력 끝에 우리는 허기를 면할 수 있었고 조금씩 저축도 할 수 있어 우리가 얻어 먹던 그 장리곡을 남에게 주기도 했다. 그때부터 우리집은 활기를 띠어갔고 아버지도 큰 결단 끝에 큰집과 작은집으로 식구를 분가키로 했다. 난 내 생모와 동생을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고 딴 집에서 살게 됐다. 난 가마니를 짜는 한편 개똥을 줍고 퇴비하고 그야말로「해는 지더라도 어둡지 말라」는 마음으로 촌각을 아끼며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밭을 걸게 만들어 곡식도 풍성하게 됐다.그 뿐이랴 나는 스물한 살 노총각 나이에 16살의 처녀와 결혼도 했다. 그 이듬해 내 아우도 장가를 들고 정말 그때는 신바람 나는 세월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나는 어머님의 통곡 속에 일본 북해도로 징용을 가게 됐다.
『못 간다 못 간다 창아! 날 두고 어디 간단 말이냐! 꽃 같은 네 색시는 우짜고 간단 말이고』어머님의 통곡 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와 가슴을 친다. 북해도! 정말 생각하기도 무서우리 만큼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놈들의 모진 매에 동료가 죽어갈 땐 눈에서 불이 났고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다행히 해방! 나는 무사히 돌아왔다. 그때 내 나이 24살, 면사무소 사동으로 들어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면장집 집안 심부름을 비롯해 마치 머슴처럼 온갖 궂은 일을 다 했다. 일이 궂은 것은 각오했지만 24살 버젓이 마누라 거느리고 사는 사람이 남에게는 인격적으로 무시 당하면서 사는 건 정말 괴로왔다. 직원들은 모두 장 서기 김 서긴데 나를 부를 적엔「이군 이군」하며 무시할 때는 정말 괴로왔다.
그런 속에서도 나는 남과 좀 다르게 살고 싶었다. 새벽에는 개똥을 줏으러 다니고 낮에는 면사무소 사동으로, 그리고 저녁엔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들고 밤이면 공부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정말 촌각도 쉴 새 없이 바쁘게 일하는 나를 보고 동네에서는 「모범 청년」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 결과 어느날 면장님은 나를「이 서기」라고 불러주셨다.
『자네의 근면성을 칭찬 안 하는 사람이 없어. 그래 내 고원으로 승진시키지 않았나. 자넨 이미 급사가 아니야. 자넨 딱질 뗐네. 고원이라지만 자네 실력은 시시한 서기들보다 나아. 내일부터 의기동 담당 서기로 보직을 줄 것이니 힘껏 뛰어 보게나! 응? 이 서기』
정말 뛸 듯이 기뻤다. 그때부터 나는 더욱 열심에 열심을 더했다. 시간만 있으면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들고 새벽에 밭 갈고 낮에는 담당 서기로 주민과 일심동체로 뛰고 밤엔 공부를 했다.
그 결과 난 서기가 되고 이어 6ㆍ25가 터졌다. 6ㆍ25를 인연으로 나는 대구로 오게 됐는데 주사에서 사무관까지 당당히 시험에 합격하여 승진까지 했다. 계장에서 과장으로 그리고 지금은 희망원 원장 25살에야 급사로 들어갔던 내가 지금의 자리에 앉기까지는 눈물 없이 이룩된 것이 없다.「대농업용수」개발사업으로 우량 공무원 표창을 수없이 받았고 시장 도지사 내무부 장관 그리고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나와 같이 불우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고 꿋꿋이 헤쳐 나가라고 말하고 싶다. 하늘은 결코 스스로 돕는 자를 버리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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