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덮쳐오는 신비로운 사건으로서 그리스도 신자인지 아닌지의 구별이 없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구별도 없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걸어야 하는 길이다. 죽음은 생물학적 현상으로 모든 생물에 공통된 자연적 변화요 우주 안의 많은 현상 중의 하나다. 어디서나 식물이건 동물이건 사멸하고 사멸하므로써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이렇게 해서 생명과 죽음은 자연의 균형을 유지해 간다.
인간의 이성은 위의 사실을 승인하면서도 다른 편으로 인간의 마음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죽음에 반항하는 데 있다. 인간은 그의 생명을 끝까지 지키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죽음과 싸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죽음의 수용(受容)과 죽음의 공포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이 두 가지 극단 이상의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수용도 공포도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대망(待望)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것을 알고 있다든가 특별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참여하고 있는 예수의 유례 없는 생과 죽음에 의한 것이다. 예수는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새로운 인간, 참된 인간으로 사셨다.
그는 죽음을 체념하면서 수용하지도 않았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반항하지도 않았다. 그의 탁월한 생애는 자기 보존의 생애가 아니라 하느님이 치루고 인간을 속량했을 때 그는 영광을 받았다. 바로 이 근원적인 자기 부정이 완전한 생명이다. 자기 보존에 급급하면서 살아가고 죽음에의 반항에 사는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지만 예수는 전 생애를 걸고 그것을 믿었다.『한 알의 밀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맞는다.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자가 그것을 보존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그를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요한 12ㆍ24/마르꼬 8ㆍ35/필립 2ㆍ9 참조) 그 이유는 그의 죽음이 자연의 운명이나 자기 보존적 생애의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고 그로서 새로운 생명으로 옮아감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인간들은 예수의 죽음과 성령에 의해 하나로 되어 있다. 그들은 세례와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편에서 볼 때 믿는 자의 생사관은 달라진다. 사랑으로 인한 자기 부정의 생은 죽음이 된다. 그로써 그리스도의 생명과 하나가 되고 최후의 죽음에서 참된 생명으로 발전해서 새로운 생명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문을 통과한 후에야 이루어진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의 생명은 잠정적인 죄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우리 생애에서 성령이 십분 설사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자아가 파괴되어야 한다. 인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파괴되었음을 우리는 믿는다.『첫째 아담이 그의 죄로 전 인류의 죽음을 초래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생명을 주는 영으로서, 그 은총의 업적으로 죽음을 멸하고 영원한 생명을 인류에게 가져왔다』(꼬전 15ㆍ45~47/로마 5ㆍ17)
『아담은 그리스도의 예형이다』(로마 5ㆍ14)
그러나 인간은 저절로 죽는 것처럼 저절로 그리스도에 의한 불사(不死)를 받는 것이 아니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의 죽음을 닮는다면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도 그를 닮을 것입니다』(로마 6ㆍ5) 라고 한 것과 같이 인간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그의 죽음의 모습과도 닮고, 그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필립 3ㆍ10) 믿는 자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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