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또가 죽던 날은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예끼! 몹쓸 자식. 애비 가슴에 못을 박고 먼저 가다니』거적으로 말아 새끼로 둥쳐맨 아들의 주검을 지게에 진 그 아버지의 목멘 탄식을 듣노라니 무딘 이 가슴이 꽉 죄게 답답하다.
스물한 살! 못다 핀 아까운 나이에 그 몹쓸 벌레가 그의 양쪽 폐를 남김 없이 갉아 먹어버렸다.『너무 고통이 심할 때는 이렇게 묵주알을 꼭 쥔 채 단 한 알을 굴릴 수가 없어요. 회장님』앙상하게 뼈만 남은 하얗게 바랜 그 손에 꼭 쥐어진 검정색 묵주알! 한 문장을 말하기가 너무 힘겨워 그의 인중(人中)이 가쁜 숨 속에서 파르르 파르르 떨고 있다. 나는 차마 그 비극적인 모습을 똑바로 응시할 수 없어 시선을 돌려 규율부 완장을 두르고 찍은 그의 고교 시절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비극이 승화되어 오히려 숭고함에 이르는 그 처절한 순간을 오열 속에 감지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나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땐 그 방을 나와버리곤 했다. 그렇게 사흘 낮 사흘 밤이 지나자 그는 무수한 고통 속에 이 세상 때를 씻고 그 창백한 얼굴에서 광채가 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그의 호흡이 폭풍후의 고요함으로 변해가고 마침내 영원히 끝나버렸다.
죽음! 인간 실존에 내재된 결정적 모순이여! 영생에 대한 신앙 이전에 인간적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비참이여! 오직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만 유일한 위안이 있을 뿐인가?
아들의 주검을 지게에 지고 석양에 비 맞으며 휘청휘청 걷는 그 아버지의 뒷모습을 볼 때 선친의 사망 전보를 받았을 때 보였던 바로 그 색깔이 사물사물 나타나기 시작하여 귀를 막고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57년 8월 25일 저녁. 일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오던 중 지급 전보를 받았다. 무심히 펴 보니「25일 아침 부친 별세」란 아홉 글자가 동공 속으로 빨려들어왔다. 그러자 헙!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과 찡! 하고 양 귀에서 굉음이 폭발한다.
가물거리는 의식을 바로잡느라 안간힘을 쓰는데 눈 앞에서 순간 강한 불꽃이 스치더니 천지가 암흑 속에 샛노랑으로 변해 있다. 황시현상(黃視現象)! 혼신의 힘을 다해 성당 문을 열었다.
죽음의 색깔을 흑색이라고 누가 이름하였는가? 다분히 명명세계에 대한 주입된 사고(思考)에서 오는 착각된 표현일 것 같다. 내 경우 확실히 죽음의 색깔은 황색으로 체험되었다. 아무색이든 상관은 없으리라.
다만 살아 남아있는 우리가 죽은 이로 하여 색조로 구상된 세계가 전혀 다른 세계로 변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전교사로 일해오는 동안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살아왔다.
그때마다 망자와 가까운 이들의 표정에서 어느덧 죽음의 색깔을 읽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렸다. 망인의 생존시에는 그렇게도 찬란하던 원색의 세계가 그를 잃었을 때는 암영(暗影)을 드리운 또 다른 색채 세계로 변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그만큼 원죄세계의 실상을 직관하게 되는 것인가? 아픔이 석류 속처럼 영그는 밤이면「에덴의 꿈」이 산산이 깨어진 삭막한 땅 위에서 구멍 뚫린 가슴을 안고 몸부림 칠 그 어느 누구의 슬픔을 함께 울어준다. 과연 황색의 죽음세계를 넘어선 부활세계는 무슨색일까. 색직공(色織空)의 공히 이상의 미지색깔로 꾸며졌으리라 믿고 산다.
『죽음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부활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내게 있어서는 아직도 죽음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한 상태일 뿐이지 죽음을 광명을 위해 의지로 받아들이는 순교자의 마음에 도달해 있지 못하다. 그것은 자애심일까? 두려움일까? 의지의 순화와 지혜의 섬광이 아직도 어린 아이의 것이기 때문이리라. 두더지의 생을 사는 떠벌이가 되지 말고 침묵 속에 순교자의 얼을 배워 보겠노라 다짐해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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