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두 번 장차 다가올「당신의 죽음을 세례」라고 부르신다. (마르꼬 10ㆍ38/루까 12ㆍ50) 이것은 요르단 강변에서 받으신 그의 세례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고 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이 순종과 봉사의 마지막 행위요 세례의 완성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우리도 예수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의 길,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봉사와 순종의 길에 공동으로 결속되어 있음을 승복한다. 철저하게 타인을 위해서 사신 예수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도 그분의 능력과 성령 안에서 겸손한 봉사자로 살아가고 우리의 죽음을 최후의 봉사로 받아들일때 예수에게 있어서와 같이 우리가 완성되고 예수와 함께 온전히 자유로운 자들이 된다. 죽을 운명을 지닌 우리의 생명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보람찬 것임을 알려주는 것은 예수께 생을 건 우리의 믿음이다.
죽음의 문제는 종말론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각 사람에게 있어 죽음은 그의 종말이다. 따라서 내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고 염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오랜동안 많은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주로 이 개인의 종말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런 관심이 조금 줄어들면서 그런 개인의 영적 복락보다는 세계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오히려 그런 관심 쪽이 성서적이다. 구약성서에 있어서는 개인의 구원에 촛점을 둔 곳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신약성서에 있어서도 새로운 하늘과 땅의 대망 그리고 거기에 사는 의인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신약성서에는 그의 대망이 개인도 빛나는 미래에 참여하리라는 기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 세계와 개인과의 밀접한 관계에 분열이 생기면 어느 한쪽이 희생된다. 개인의 미래에만 관심이 집중되면 세상은 어떻게되든 상관할 바 아니고 나만 천당에 가면 된다는 사고로 이끌고 반대로 세계의 미래에만 관심이 집중되면 개인이 희생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어느 쪽도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실존은 이중의 국면(局面)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어져가는 세대의하나의 고리로서 살아있는 한 그 유지와 계속에 공헌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지상사회의 개선에 공헌하려고 한다. 다른 편으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과 배려의 대상이고 비밀과 운명을 갖춘 인격이라는 것을 인정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인간 실존의 두 가지 국면은 어느 한쪽에 환원할 수 없다. 하나를 높이고 다른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불행하게 된다. 공산주의와 불교는 이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 공산주의에 있어서는 세계의 미래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되고 불교에 있어서는 세계로부터 은퇴하는 것에 의해 개인의 구원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이들이 나눌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의인들이 사는 새로운 땅을 대망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도 거기에 살 것을 대망한다. <끝>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