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십여 년 전 제 나이 19살 때 나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 강화도 교동 벌판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십키로 십키로 라고 했지? 고향마을까지는…아! 답답하다. 아무도 없나보다. 이 넓은 벌판에… 앞이 안 보이니 이대로 눈에 파묻히면 나는 살아남지 못할 거야』
나는 보이지 않는 눈이지만 이미 해가 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초조해 있었습니다.
『가자! 아무 데고 무턱대고 가보자. 사람 소리가 날 때까지-』
지치고 허기진 나는 차라리 눈 속에 파묻혀서 그대로 잠들고 싶었습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 바람 타고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송이 하얀 솜을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어디선가 멀리 들려오는 어린 아이들의 노래 소리-나는 꿈길처럼 더듬으며 그 노래에 매달리듯 앞으로 나갔습니다.
아이들에게 발견된 나는 그네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어느 교회당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한참 만에 내 정신이 든 나는 옆에 나를 돌보시고 있는 집사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자한 집사님은 내게 더운 물과 허기를 메꿀 빵을 주셨습니다.
『앞도 못 보는데다 오른팔이 없고 왼팔뿐이군! 그 몸을 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네-고향에 오고 싶었습니다. 별별 수모를 다 당하며 왔습니다』
『음 부모님을 찾아야겠군!』
『안 계십니다. 일곱 살 때 이곳을 떠났으니까요』
나는 몸이 좀 풀리자 집사님에게 내가 불구가 된 동기며 6ㆍ25 때 부모님을 잃은 얘기를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다섯 살 때 고모님댁에 맡겨진 지 일 년 만에 고모님이 돌아가시자 나는 할 일 없는 고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언제나처럼 바닷가에 나와서 갈매기를 바라보며 혼자 놀던 때! 처음 보는 군함이 신기해서 해지는 줄도 모르고 구경하다 돌아오는데 석양빛에 문득 번쩍 하고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악!』
불발탄인 줄도 모르고 줏어갖고 놀던 나는 일시에 눈과 오른팔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근처 미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 나는 아무리 기다려도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자 그대로 고아원을 전전하게 된 것입니다. 집사님은 동정어린 목소리로 내 과거를 계속 물어주셨습니다.
『그래 19살 지금까지 10여년을 객지로 전전했군-』
『네 강화읍의 명심원 파주의 광명원, 광명원이 부평으로 옮기고 해산한다는 바람에 대구 라이트 하우스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나를 구출해주신 해병 아저씨들 미군 목사와 간호원 아줌마들 점자를 가르쳐주신 광명원 원장님, 그리고 대구로 보내주신 앨리슨 중령님, 학교에서 누님처럼 아껴주신 배정욱 선생님! 그리고 나를 친누님처럼 사랑해주셨던 배 선생님의 친구분!
『그럼 별로 외로운 생활은 아니었군』
『아닙니다. 그분들이 모두 제 곁을 떠나자 나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강화도 교동! 그래도 고향의 땅 위에 서면 뭔가 부모님의 정이라도 느낄 것 같아서…』
나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집사님은 내게 용기를 주시느라고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면사무소로 가서 친지를 찾는데 앞장서 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외가쪽으로 아저씨가 생존해 계신 사실을 알아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손수 개간해 놓으신 농토가 얼마간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저씨는 죄 지은 사람처럼 쩔쩔매며 말을 했습니다.
『재환이 오해는 말게. 내가 그 땅을 가질려던 게 아니야. 자네를 찾을 수 있어야지. 그래서 그냥 농사를 지어온 거야. 소출이라야 겨우 쌀 대여섯 가마 날 정도이지만…판대야 겨우 십만 원이나 될까?』
『저! 아저씨!』
『아닐세, 내 이제부터 소작료 따져 주지 따져 주고 말고』
모든 사실을 뒤늦게 안 나는 분노가 끌어올랐습니다. 그런 땅이 있었는데 왜 나는 어릴 적에 그처럼 찬밥덩이에 구박만 받았던가.
그리고 연고자를 그토록 찾았건만 아무도 나타나주지 아니했던가?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관대하게 처리했습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저씨는 내게 새 옷 한 벌과 라디오를 사 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비운이 좋은 계기였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비록 불구이지만 고등학교에도 들어가고 우등생으로 계속 공부하면서 특별히 음악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대구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습니다.
『그래! 난 아직도 나의 불구를 원망해 왔었지. 그러나 이제 하느님의 뜻을 알 것 같애. 나의 이 먼 눈, 나의 이 팔 이것으로 나의 이웃을 나의 형제들을 위로하고 도울 길은 없으랴? 그것을 찾아야 한다.』
대구로 돌아온 지 2년 후 나는 그 열매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단손으로 친 피아노 연주!
교장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감동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나팔 트럼펫을 상으로 받고 계속 정진, 드디어 소원하던 사회사업대학 수석으로 합격되어 장학생이 된 것입니다. 대학 과정을 마치는 동안 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겪었으나 나는 끝내 어엿한 중고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꿈만 같고 하느님의 은총에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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