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단층집 거실에서 기자와 만난 정 주교는 장작불을 한결 따사롭게 지핀 후 좌정했다. 정 주교는 먼저『3ㆍ1사건 공판정에 나온 신부님들의 건강은 어떻습디까?』하며 옥고를 겪고 있는 신부들의 안부부터 물었다. 때마침 창 밖에는 솜털 같은 눈발이 소리없이 내려 쌓이고 있어서 공해와는 거리가 면 산간(山間)의 서재와 같은 운치를 돋구었다.
기자가 이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정 주교가「학자주교」라는 선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70년 10월 3일 청주교구장으로 착좌한 이래 6년간 정 주교는「교회법원사」「교회제도사」를 저술했고 최근에는 토마스ㆍ머턴 자서전인「칠층산」을 번역 출판했다.
원고지 2천7백 장 분량인「칠층산」은 바오로출판사의 청탁으로 1년 반 동안 번역했단다. 저술과 번역작업은 주로 밤 시간을 이용하는데 앞으로도 시간에 쫓기는 부담만 없으면 계속 필을 들겠다고 말해「학자주교」의 의욕을 과시했다.
정 주교는 주교회의 상임위원이며 교리교육위원장이었고 인구 20만에 불과한 청주시는 충북대학 청주대학 여자사범대학 간호대학 교육대학 등 대학이 5개나 되는「교육도시」다.
정 주교가 교육, 특히 학생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 주교는『학생들을 위한 일을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청주 시내에서 하숙 또는 자취생활을 하는 학생 수도 조사해 두었는데 모두 8천4백36명이나 되었다. 현재 가톨릭대학생은 3백 명이 넘고 해마다 영세자가 늘고 있단다.
주교관 맞은편에는 학생들을 위해 개방해온 단층 건물을 증축, 현재 연건평 4백 평이 넘는 3층 건물이 완공단계에 있었다. 이 건물은 2층까지 내부공사가 완료되는 12월 6일 니꼴라오축일에 축성될 예정인데 각 액션단체의 회의실, 특히 학생들을 위한 독서실과 회합의 장소로 개방될 것이라고 한다.
한국 가톨릭은 2백 년의 역사와 많은 순교자를 갖고 있으면서도 1백 년 역사의 개신교에 비해 활동 면에서 크게 뒤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주요 원인을 정 주교는「교육사업의 열세」에서 찾았다. 연세대학과 이화여대가 90년의 역사를 가진 반면 서강대학은 10년에 불과한 실례를 든 정 주교는 20세기 초반에 선각자의 역할을 한 YMCA 같은 교회운동도 가톨릭에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 주교는 국제여자협조회(AFI) 회원들이 서울 명동에서 여학생 기숙사를 운영하는 것이 조그만한 일이긴 하나 높이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 주교는 청소년 문제가 크게 대두뇌는 현실에 비추어 수녀들도 신자와 비신자를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기숙사를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같은 현실 파악과 의견 제시로 미루어「학생들을 위한 일」이 어느 정도 뚜렷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청주 시내에는 현재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나 병원이 없고 양로원만 하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 주교는 교회가 대외적인 봉사를 안 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면서 개신교 장로들은 고아원 등 자선사업을 많이 하는 반면 가톨릭 신자는 이런 사업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일반적인 경향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편 정 주교는 교회가 신문 방송이나 학교 또는 병원을 직영하는 문제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가톨릭 간판을 걸고 실제로는 교회의 정신과 상반되는 방향으로 운영한다면 가톨릭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때 교회가 운영하던 모 신문은 외설물을 연제하여『그게 교회 신문이냐!』는 비판을 받았다. 수녀들이 운영하는「자선」기관이 영리적인 이미지만 풍겨주는 사례도 적지 않다. 따라서 교회가 운영하는 기관이 아니더라도 종사자들이 가톨릭 정신으로 일한다면 그게 바로 가톨릭이라는 이론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 정 주교의 견해였다.
청주교구는 지난 6년간 인구 증가도 없고 신자 수도 별 변동이 없다. 성당 분포도 어느 교구보다 조밀하여 그동안 2개가 늘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청주교구 사제들은 지난 9월 성지개발사업을 연차적으로 벌일 계획을 세우고, 우선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의 성지 3백 평을 평당 2천5백 원에 구입하기로 결의했다. 이 성지는 1869년 4월 23일 아직 복자품에 오르지 못한 김요셉(68) 전바오로(23)를 비롯 많은 신자가 교수형으로 순교한 곳이라고 한다.
사도직 단체로는 빈첸시오회와 레지오가 활발하고 꾸르실료와 그리스도 공동체 묵상회가 자주 실시된단다.「학자주교」인 정 주교는 동적(動的)이라기보다 정적(靜的)일 수밖에 없지만 본당 방문은 수시로 하고 견진 때 이외엔 공식 방문은 하지 않는단다. 만과는 교구청의 성직자 수도자와 함께 바치는 정 주교는 공식 일정이 없는 한 독서에 열중한다고 측근들이 귀띔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