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김 부장이 전례 없는 결근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 그는 핼쓱하고 초췌한 얼굴로 츨근했고 하루 종일 초점없는 눈동자로 창밖을 내다보면서 계속 하품을 해대는 것이었다.
일에 관한 한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김 부장의 그러한 행동거지가 형화에게는 이상스럽다 못해 우습게까지 여겨졌다.
그래서 형화는 하루 종일 김 부장에게 한 번 두 번 농담을 던졌는데 김 부장은 그럴 때마다 전혀 표정이 없는 얼굴로 형화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퇴근길이었다.
-김 부장님 오늘 저녁 저와 데이트 어때요?
김 부장은 묵묵히 걸었다.
-뭐 신사가 시시하게 그래요?
그래도 김 부장은 말없이 걷기만 하다가 길게 하품을 하는 것이었다.
불쑥 장난끼가 발동한 형화는 어젯밤에 무얼 하셨길래 그러냐는둥 농담을 던졌지만 김 부장은 여전한 표정으로 계속 걷기만 했다.
그러더니 문득 형화에게 물었다.
-조양은 사람이 죽는 것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해?
-확실히 오늘 어떻게 되신 것 아니예요? 별안간에 징그럽게 그런 이야기는 왜 꺼내세요?
-징그러워?
-그렇지 않구요. 사람 죽은 냄새며 그 시커먼 관、게다가 밤이면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나올 것 같은 유령…그것들이 전부 징그럽지 않고 어떻단 말이예요.
-그럼 내가 한 번 죽어서 형화에게 유령으로 나타나야겠군.
-에그 끔찍해라.
-형화가 죽는다는 생각은 안 해보았나?
-내가 왜 죽어요.
그랬더니 김 부장은 큰 소리로 우와왓하고 웃었고 다시 한 번 큰 하품과 함께 기재개를 켜는 것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체념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잃었다.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지자 형화는 약이 올랐다.
-그냥 가실 거예요?
-가야지.
-숙녀가 하는 말을 이렇게 무시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김 부장은 한참을 그 촛점없는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정신을 차린 듯
-숙녀 대우하기 위해 무슨 핑계라도 대야겠군. 으흠…무슨 핑계가 제일 좋을까…아 이게 좋겠군.
김 부장은 피식 웃더니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를 만나봬야 되거든.
-어머니요? 어머니라니 친어머니라도 나타났다고 둘러대시려는 거예요?
-말씨가 좀 고약하군. 그러나 내가 참아주지.
형화는 공연히 더 약이 올랐다. 그래서 짓궂게 따지고 들었다.
-어느 어머니를 만나세요? 양어머니?
-푸훗 그래 양어머니 말이요.
-매일 만나는 양어머니를 오늘 딱히 만나야 할 이유가 있으세요?
-딱한 일이로군. 어쨌건 나는 바쁘니 먼저 가겠소.
김 부장이 돌아서기 전에 비쳤던 그의 눈동자는 아침나절처럼 졸음이 가득했다.
-양어머니 핑계 댈 것이 아니라 어떤 여자한테 간다고 그러세요. 허긴 양어머니도 여자는 여자니까.
좀 지나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형화는 생각 나는 대로의 말을 던져놓고 그곳을 급히 떠났다.
얼핏 크윽 하는 웃음소리가 형화의 귀에 남아 돌았다.
문제는 그 다음날 아침의 일에 있었다. 형화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김 부장은 책상에 엎디어 있었다.
형화는 새삼 어제의 감정을 기억하고-나도 양어머니나 있었으면 좋겠다. 저녁마다 만나러 가게.
하고 지껄인 것이다.
이 소리에 엎딘 책상에서 일어나는 김 부장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보다도 놀라운 것은 김 부장의 양복 저고리 주머니께에 누런 삼베로 만든 리본이 달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형화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몇 일 후 사원들 간에 들려오는 소리에 의하면 김학중은 혼자서 모친상을 치뤘다는 것이었고、그 경황에 아무 말 없이 회사에 나와 일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들 수근수근댔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김 부장은 더욱 일에만 집념했고 더욱 어김이 없는 기계가 되어가는 것이었다.
이제는 형화에게 사무적인 이야기 외에는 말은 건네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형화는 각별히 미안하다는 생각으로 가슴 저려오는 적이 없었고、오히려 뭐 남자가 그런 일로 그렇게 토라질 것까지 있겠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김 부장의 노모님의 죽음에 관해서도 사실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세상에서는 하루밤 새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전연 관계없는 한 노인의 죽음이 형화에게 특별하게 받아들여질 까닭이 없는 일이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양어머니라는 단어부터가 형화에게서 어떤 충격이나 감정도 느끼지 않은 만큼 거리감을 주는 것이었다.
육 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그 일들을 형화는 점점 잊어가고 있었는 반면 김 부장은 나날이 더욱 가슴에 새겨가는 것 같았다. 아마도 김학중은 심한 배신감에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인 진심에 상당하는 형화의 애틋한 태도를 바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의 고아라는 위치가 형화로부터 화살을 받았다고 느꼈을 때 그 숙명적인 저주에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형화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타이프라이터로 치다보니 벌써 어지간한 서류는 거의 정리될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 온다.
시간 내에 어서 이것들을 마무리 지어야지.
점심시간에는 누구와 같이 식사를 하고 코피를 마실까.
그런데 형화는 이경민이 자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찾아오고 있다는 걸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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