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아、조형화씨?
인사과에 있다던 임이라는 사원의 전화였다.
-자료를 돌려드릴 겸 점심이나 같이 하시지요.
-뭘 그까짓 것 가지구….
-아닙니다. 점심 약속 없으시면 곧 라운지로 올라오시지요.
-얼굴도 잘 모르겠고 그만두겠어요.
-얼굴이야 제가 조형화씨를 기억하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자、그럼 이따가 보십시다.
전화가 끊겼다.
몇 주일 전 임이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찾아와서 비서실에 비치된 여러 무역 관계 책자들을 휘둘러보더니 형화에게 그 내용들에 관해 물어보며 말을 건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형화는 대충 아는 바 대로 대답을 해줄 뿐이었는데 임은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이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는 하도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이냐고 물어서 꾸려주고 사무실을 나온 적이 있었을 뿐이다.
책은 돌려받아야 하니까 형화는 핑계삼아 마침 잘된 일이지 뭐냐는 듯이 사무실 정리를 하고 나섰다.
모두들 분주하게 사무실을 떠나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피곤하고 흥미 없는 일이라는 듯 초점 없는 눈동자로 기지개를 켜거나 몸을 비틀어대고 있었다.
문득「신성 좋아하시네」하고 대답질하던 사원의 얼굴에 형화의 시선이 닿았다.
그는 2년 사이에 벌써 팔팔한 기운을 잃어버린 듯 힘들게 걸상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팽팽하게 어리던 얼굴은 어느새 여느 샐터리맨과 꼭 같은 표정으로 닮아가고 있었다.
신입사원 무렵부터 유난히도 직장인의 권한이나 노동법 따위를 들먹여 사무실을 가끔씩 술렁이게 만들곤 하는 그였다.
그러나 소위「물먹는다」는 말처럼 위로부터 몇 차례 경고와 위협을 받으면서는 차차 풀이 죽어가는 것이다.
(이 직장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국가적 차원에서의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신성한 곳입니다.)
어쨌거나 모두들 신성하다는 단어 앞에는 맥을 못 추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늘 형화는 이 신성하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최 회장은 신성하다는 말 앞에 무력해지는 사원들의 심리를 용케 포착한 것일지도 몰라.
그리고 나서는 형화도 기지개를 켜고 싶어졌다. 얼굴에 찌든 주름살 한두 개 정도가 급히 패여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마저 있었다.
형화는 신성 싫어하던 사원에게서 눈을 돌리고 사무실을 나왔다.
대부분이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으나 형화는 어느 점잖은 신사와 함께 올라가는 것을 탔다.
아마도 흙을 밟지 않았을 신사의 검은 구두는 먼지 하나 없는 광택을 유지하고 있었고 하얗게 접어진 주머니의 손수건 아니면 검은 양복 어느 구석에선가 향수 냄새가 흘러나왔다.
형화는 그를 흘끔흘끔 몰래 쳐다보았다.
그새에 차는 이십일 층에 정거했고 형화와 신사는 복도로 내려섰다.
라운지에서는 벌써 딸깍딸깍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접시와 스픈이 마찰하는 소리로 경쾌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형화는 임을 기억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적당히 돌아다니면 자기가 알아보겠지.)
그래서 형화는 마치 친한 사람을 찾기라도 하는 듯 두리번거리며 의자 사이를 걸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가 손에 책을 들고 반가운 표정으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아하 맞다. 저 사람이 임이다. 형화는 자신도 반가운 양 인사를 꾸벅 하고는 그 자리로 가 앉았다.
-아이쿠 반갑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뵈니 반가운데요.
-날씨가 아직도 꽤 덥습니다.
-아 네.
-우선 무얼 좀 드십시다.
웨이터가 와서 식사 주문을 받아갔고 임은 형화에게 이것저것 말을 건넸으며 형화는 가벼운 대답으로 응수했다. 그런데 순간 형화에게 이상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이다.
읍!
구역질 비슷한 것이 치솟았다.
그리고 식사가 나왔기 때문에 형화는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회사 일은 재미있으십니까? 최 회장님은 퍽 너그러우신 어른이시지요
-취미가 많으십니까? 어련하시겠습니까.
-결혼은 언제 하실 예정이십니까? 필요하시면 제게 말씀만 하십시요. 좋은 사람 소개해 드릴 테니까요.
임은 이런저런 말을 계속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형화는 그때 다시 읍 하고 구역질을 느끼면서 그 이상야릇한 냄새가 임의 온몸에서 덩어리 채 풍겨 나오는 지독한 향수 냄새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제길헐、멋을 내려면 정도껏 할 것이지 지독한 향수를 쏟아 부었군」
그제서야 형화는 임의 행동이나 모습이 전혀 가장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일개 말단 사원이 마치 엘리베이터에서의 신사를 흉내내기라도 하려는 듯 차려 있었지만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형화는 소지품이 바닥에 떨어진 듯 허리를 굽히면서 얼핏 임의 구두까지 살폈다.
윤기 있는 그의 구두의 뒤축 모서리에는 붉은 흙이 미처 닦여지지 않은 채 묻어 있었다.
형화는 될수록 빨리 자리를 일어설 양으로 급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형화의 어깨가 흔들려 음식이 쏟아지면서 커다란 몰소리가 들려왔다.
-헤이 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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