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 같이 퍼붓는 빗속에서 꼼짝없이 올데갈데 없는 방랑객이 된 우리의 모습도 처량했지만 상대방의 어려움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본성적인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인자는 머리 누울 곳도 없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하곤 겨우 화를 가라앉혔다.
이렇듯 집없는 설움은 다른 설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고 무서웠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겼던 수재민들도 국가의 보조와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인근지역에 살 터를 마련, 집단 이주했다. 그들의 이주 후에도 우리는 트럭에 밀가루 라면 등 모금한 구호품을 싣고 그들을 찾았다.
매번 부족하기만 한 도움은 오히려 수재민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면서 우리는 꾸준히 그들의 재건을 위해 함께 노력했다. 없는 이의 설움은 없는이가 더 잘 안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일상생활의 궤도를 채 잡지도 못한 상태에서도 열심히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집 잃은 설움을 달래고 새 삶의 터전을 가꾸어 나갔다.
엄청난 재해 속에서 그 재해를 함께 극복해 나가면서 나는 아무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라고 기록된 고린토 후서의 말씀처럼 철저히 파괴된 생활의 질서 그 위에 겹쳐진 가족을 잃은 설움 등을 이겨나가는 인간의 의지와 끝없는 노력을 보는 기쁨이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잘 갖추어진 편안하고 평탄한 도시의 전교생활보다는 부족함과 아쉬움이 있는 것보다 많은 시골본당에서의 소박한 전교생활은 분명히 어렵고 고달팠지만 수도자로서 꼭 갖추어야 하는 청빈의 정신만은 투철하게 가르쳐주는 교육장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당시 내게 고달픈 매력을 주었던 시골 본당에서의 전교생활은 현재도 여러 가지 전교상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①사제 부족은 차치하고서라도 전교수녀 및 전교사의 턱없는 부족 ②도시본당도 예외는 아니지만 심각한 재정적인 어려움 ③농촌 및 어촌의 특수성을 감안한 특수전교의 필요성 등은 시골본당 사목상의 문제점 중 가장 두드러진 것들이다.
나는 지금도『수녀들이 시골에는 가기 싫어한다』수녀원에서는『시골 신부가 전교수녀를 청하면 3년을 기다려라, 5년을 기다려라 하면서 서울 및 도시의 돈 많은 신부가 청하면 즉시라도 파견한다』는 등의 말을 가끔 듣는다. 물론 이런 말을 전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요한 수요대로 모두 충족시킬 수 없는 수도 성소의 부족이 가슴 아플 뿐이다. 그리스도께서『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습니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지금 교회의 일꾼은 너무나 부족한 현실이다.
이러한 부족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방법은 부족한 수도 성소의 증가를 위한 노력과 어려움을 참고 극복해 나가는 인내심이다.『우리 본당에는 훌륭한 신부 수녀가 와야 한다』는 등의 생각은 어리석고 이기적인 것이다. 주어진 여건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부족하고 모자람 속에서 협력할 때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일치는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 지체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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