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친 소련군 수용소에 포로의 몸이 되 있었다. 수용소에서는 매일 사열식 점호와 광산노동이 있었지만 우편물은 한 번도 오지 않았고 배달해주지도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직 살아 있을까?』그것만이 가장 궁금한 걱정일 뿐 즐거움이라곤 없는 수용소 생활이었다.
수개월이 지난 뒤에야 나는 겨우 구내 이발소의 거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됐다.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발사가 『누가 당신을 알아보리라고 생각하시오』라고 물었다.
나의 몸무게는 겨우42kg밖에 나가지 않았을 만큼 여위어 있었던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우리수용소에는 약6천명의 포로들이 있었고 나는 키가 1m56cm밖에 안됐기 때문에 항상 뒷줄에 서 있었고 그래서 앞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내겐 도움이 됐다. 뒤에 서서 묵주기도를 하는 덴 앞줄보다 사열관의 시선을 피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당시 닳아빠지고 줄도 엉킨 묵주를 갖고 있었다)
성모 승천 대축일 날이었다. 포도들은 줄을 서서사열을 받고 있었다.
저녁 6시였다. 수용소인 만큼 성모 승천 대축일에도 평상시와 같이 광산에 올라가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축일이 아닌가! 나는 특별한 마음으로 줄을 선채로 묵주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때 누가 대열사이로 들어왔다.
여의사였다.
우리들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키가 자그마한 여자로 항상 군인유니폼을 입었다.
나는 그녀가 대열사이를 검열할 동안에도 계속 승천 대축일 기도를 외우고 있었다.
갑자기 맨 앞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누가 졸도를 했나?
나는 발돋움을 해가며 무슨 일인가 보려고 했지만 앞줄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여의사가 맨 앞줄을 지나와 우리 쪽으로 돌아봤다
무얼 하려는 걸까?
나는 10번째 줄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키가 작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그녀는 내 쪽을 보고『이리 나와!』라고 했다.
나는 내 앞쪽의 키가 큰 친구를 지목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나를 지목한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통역이 나에게 건강상태가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매우 허약해진 상태라고 대답했다.
그 여의사는 무어라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서툰 독일어로 대열 옆쪽으로 나와서라고 말했다.
대열 가에는 벌써 열 명의 포로들이 나와 서있었다.
우리들은 도대체 어떻게 할 셈일가?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수용소에서 석방된다는 얘기였다. 환자를 몇 명씩 가려서(형식적으로나마) 고향으로 풀어준다는 것이다. 포로협정인지 뭔지 모르지만 여의사는 키가 작고 여윈 나를 중환자로 봐준 것이었다.
나는 성모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성모님-감사합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도 곧 석방돼서 저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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