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고종의 승하와 장례식이 계기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폭발한 해이다. 이른바 삼일운동이란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거사가 불행히도 우리 가톨릭과는 거의 무관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교구 통신문의 편집자마저 이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던것 같다.
상당한 면을 이 사건 보도에 할애하고 있다. 그때 프랑스 신부들이 우리의 독립운동을 과연 어떻게 보고 듣고 해석했는가는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아닐수 없으므로 가능한 한 통신문의 기사를 직접 인용 소개하겠다.
그것은 소설같은 이야기이다. 그만큼 수천의 소문중에서 진리를 가려내기가 어렵다. 신문에 의하면 이러하다.
■사건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반경 그 방향을 구별할 수 없을만큼 먼데서 아우성이 들려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후에 알게 되었다. 수천의 청년들이 탑골공원을 떠나서「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울의 큰거리를 활보하였다.
그들의 애도를 표명하고 그들의 희망을 알리고저 여러 영사관을 찾아갔다.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거나 해산당한 이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서울의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었고 그들의 외침은 4시반에 그쳐버렸다. 이 운동은 선언문의 낭독에서 비롯하였다. 즉 33명의 저명한 한국인들이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였고 수천장을 찍어 살포하였다. 이 33인 중 29인이 이미 당일에 잡혔는데 그 중 14명은 기독교인 아니면 교수였고 불교도가 2명 그리고 남은 2명은 직위가 없었다.
이 독립운동은 서울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오 같은날 거의 같은 시간에 전국 여러 주요도시에서 일어났는데 특히 북부지방의 평양 중화 성천 황주 의주 수안 원산 함흥 등지에서 일어났다.
3월 1일 이후에도 시위는 더해갔고 특히 장례식이 있은후에 격렬해졌고 시초엔 가담하지 않았던 지방에까지 파급되었다. 2월 한 달 동안 신문이 그러한 혼란을 보도하지 않은 날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시위는 평화적이었다. 그러나 때로 폭력도 있었고 따라서 사망자도 나왔는데 아직 그 총계가 발표되지 않고있으나 희생자의 수는 상당할것이다.
현재는 잠시 잔잔해진듯하다. 서울에서 한 달 동안 계속 들려온 만세 소리도 그쳤다. 경찰의 감시가 심해진 때문일 것이다.
■운동의 기원
한국인으로 하여금 반항케한 동기에 관하여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다. 다음은 어떤 신문이 신빙할만한 것으로 발표한 것이다. 손병희는 몇 년전 그의 천도교인들에게 한국이 1916년 3월에 독립을 되찾을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게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된 시기는 왔지만 그러한 기회는 나타나지 않았다. 손병희는 그의 예언의 실패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들의 반대와 그의 명성을 잃게 될 무렵에 그는 고종의 승하가 또 하나의 유리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이상의 해석보다는 좀 더 그럴듯해 보이는 평화회의가 민족자결권을 발표하게 되자 한국민들은 특히 외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국제연맹에 탄원서를 제출한 후부터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자기들을 위한 선언이라고 믿었다. 한국인들은 성공을 믿었고 또한 독립에 대한 갈망을 더욱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구에「빠리」가 한국측 교섭을 승인한 전문이 왔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모두가 그것을 믿었다. 셋째 해석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 운동을 지지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소문은 비록 짧은기간이긴 하였으나 여하간 이로 인하여 세브란스병원 종로의 감리교회 등의 여러 외국인들이 수사를 받았다. 사실일까? 그러나 이 세상이 우리나라가 아닌 우리가 그렇게 진상을 알아낼 수 있을까? 여하간 우리가 혐의를 받은것은 그들만큼 오래가지는 않을것이다.
■결과
직접적인 결과로 많은 사람이 잡혔다. 서울에서만도 2백65명이 잡혀 재판을 받고있다. 또 다른 중요한 결과로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부를 포기하였고 적어도 서울의 대부분의 상점들이 1개월 이래 문을 닫고 있다. 또한 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유일한 생계인 일터를 떠나버렸다.
간접적인 결과로서 정부는 한국에서의 민주적 개혁과 좀 더 자유가있는 통치를 예상하고 있다. 그러는동안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경찰을 강화하고 있다.
바라건데 가톨릭 교회는 올바르지 않은 증오의 상속자가 되지 않기를. 또한 자기의 사명이 아닌일로 인하여 희생이 되지 않기를! 막연하지만 천주교 선교사와 한국인 신부들도 수색을 받았다는 소문이다. 우리는 감출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니 도리어 빨리 진상이 밝혀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불란서 주교와 신부들은 비록 일본인의 통치일지라도 그것이 합법적인 정부이므로『체살의 것은 체살에게 바치라』는 원칙을 따라 가톨릭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지않은 것을 다행하고 잘한 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 신자와 학생을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취해진 모든 대책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이 운동의 선두에 나선 기독교인들로부터 우리 가톨릭은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용산 대신학교에서 일어난 것처럼 젊은 학생들의 피끓는 애국심을 억누를수 없었기 때문이다.
3월 1일 밤 대신학생 50여 명이 모두 잠자리에 들 무렵 마포구와 구 용산 일대의 사람들이 외치는 만세소리가 들려왔고 이때 피끓는 젊은 신학생들의 가슴은 애국심에 불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급작히 기숙사의 정적을 깨뜨리고 누군가가 외쳤다『우리만 가만히 있을수 있느냐』『옳소, 우리도 만세를 부르자』순간『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그야말로 기숙사안에 소동이 벌어졌다. 용산 신학교는 이른바 만세소동으로 여러 신학생을 잃어야했다. 뿐만아니라 교구 당국은 징계상의 조처로서 이 해 동안에 있을 예정이던 서품식을 모두 중단한다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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