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과 21년은 한국교회를 위해서 특히 서울교구를 위하여 여러가지 경사스러운 사건으로 점철된 해이다. 우선 1920년 2월에 간도의 최 베드로 신부가 석방되어 본당으로 돌아왔다. 최 신부는 약 1년 전에 만주의 마적단에 인질로 잡혀갔었다. 이해 만주교구는 그의 석방을 위하여 봉천 프랑스 영사관의 지지를 요구해 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간도의 교우들은 힘부치는 적지않은 몸값을 치뤄야했다.
동년 9월 21일 모든 한국인 신부와 서울ㆍ대구 양 교구의 선교사들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존경하올 민 주교의 회갑과 주교승품 25주년의 겹친경사를 축하하는 성대한 경축행사가 있었다. 실은 민 주교의 주교승품 25주년은 이미 1915년에 해당되었으나 때마침 전쟁중이라 적당한 시기로 연기했었다. 10월 30일에는 일본 및 한국의 교황대사를 겸임한 푸마소니 비온디 대주교가 한국을 순시차 방문하였다. 교황 대사는 약 10일간 체한하는동 안 서울 대구 장호원 등지를 두루 방문하였다. 또한 대사가 아직 한국에 있는 동안에「로마」로부터 서울교구의 보좌주교의 임명과 원산교구의 설정 소식이 전달되었다.
보좌주교에는 유(Devred) 신부가 임명되었고 원산교구의 초대교구장에는 서울 성베네딕또 수도원 원장인 보니파시오(Sauer) 신부가 임명되었다. 새로 설정된 원산교구는 함경남도와 간도지방을 관할하며 또한 그 관할권이 보니파시오 원장의 소속인 독일 성오띨리언 베네딕또 수도회에 위임되었다.
1921년 5월 1일, 종현 주교좌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주교 및 유 보좌 주교 두 분의 성성식이 거행되었다. 이어 5월 24일에는 교황 베네딕또 15세가 민 주교를 교황궁 내 고등 성직 교황탑 전시종로마백장으로 임명한다는 소식이 왔다. 이와 같이 이무렵 한국교회는 여러가지 경사스러운 사건으로 기쁨에 가득차 있었지만 그 반면 복음전파 상에서 겪어야했던 여러가지 장애로 말미암아 받게되는 고충도 심상치가 않았다. 그 첫째로 신교로부터 오는 위협을 들지않을수 없다. 신교도들과의 접촉은 우리 교우들에게 참된 위험이었다고 한다.
35년 전만 해도 한국에는 어떠한 프로테스탄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구세군 안식교 등등 많고 유력한 교파들이 도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인재도 많고 재력도 풍부하여 학교 병원 기타 사회사업에 있어서 견줄만한 상대자가 없었다
특히 수도 서울과 서북지방엔 예수교인들이 매우 많았다. 평단은 그야말로 그들의 아성을 이루고 여기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그래서 서북지방에 즉 평안도와 황해도에 사는 우리 교우들은 신교도들로부터 받은 영향때문에 남부지방의 교우들과는 전혀 다르고 아주 특수한 정신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특수한 정신상태란 구체적으로 요약한다면 이곳 지방 교우들이 전진적이고 끊임없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남쪽의 교우들의 정신자세는 비록 근자에 와서 약간 북쪽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면치못하고 있었다.
교우들이 받은 이와같은 영향때문에 교우들을 지도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고 한다. 특히 서북지방 교우들이 그러했다. 왜냐하면 우리 교우들은 일본인과 미국인 목사들이 학교 신문사 병원을 경영하고 수많은 오락과 체육 시설로 젊은이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있는 사실을 목격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우리 천주교가 빈약한 예산으로 이렇다 할 진보도 없이 허송세월하고 있음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참으로 천주교회는 저 움직이는 군중속에 한낱「어린 양떼」에 불과해 보였다.
그래서 우리 교우들 중의 많은 이들이 점점 초조해지고 목사들과 경쟁하지 못하는 것을 퍽 유감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천주교회의 병원사업이라고 해야 기껏 인천과 서울의 두 곳뿐이고 그나마도 시약소에 지나지 않았다. 또 잡지래야 겨우「경향잡지」하나뿐이다. 요컨데 이와 같은 병원이나 출판 사업을 발전시켜 같은 신교의 사업과 경쟁할 수 없는 것은 우선 이 방면의 충분한 인재가 없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대구신학교에서 처음으로 2명의 신학생을「로마」로 유학 보낸 사실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인내를 요하는 일이므로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한 선견지명적 처사의 하나였다.
인재부족의 현상에서 청소년 교육이 시급한 사업으로 판단되었으므로 서울교구는 비로소 경(KremPff) 신부로 하여금 청소년 교육을 전담케 하였다. 그러나 교육사업에 있어서도 천주교회는 우리 청소년의 향학열을 도저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 교우 부모들은 일부러 관계 요로에 찾아가서 자기 자녀들의 입학을 강요하지 않도록 부탁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정반대로 학교에 자리가 없는줄 알면서도 꼭 입학시켜 주도록 무리한 부탁들을 하기까지 되었다. 그런데 목사들은 도처에서 온갖 종류의 학교를 세우고 있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우리 신부들은 새 학교를 세우기는 고사하고 있는 것마저 유지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재력의 부족도 문제이지만 앞으로는 교사난이 더욱 문제이다. 당장은 자격도 없는 교사로 일시적으로 운영해 가고 있지만 정부가 그것을 묵인하는 것도 2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1년「조선교구 통신문」은 용산신학교에서 발간하는「따델라」지가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때 중단됐었으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간행물이어서 다시 발간한다고 변명한 일이 있다. 그러나 11월 30일『12월 1일부터 좌측통행은 지킵시다』라는 말로 돌연 끝을 맺었다. 폐간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속간될 것도 같으나 또한「따델라」지와의 경쟁으로 미루어보아 마침내 폐간된 것 같기도 하지만 모를 일이다.
회고하건대 1902년부터 1921년 사이의 20년간은 표제 그대로 격동기였다. 이 격동기의 교회사의 해설을 끝내면서 그간 지난 날의 교회생활에 관심을 갖고 애독해 주신 독자 제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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