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듣는 사람은 나를 보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다』즉 내 말을 듣지않는 사람은 나를 보낸 이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라 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주 성부의 명을 받아 인류 구원의 대사업을 완성시키려고 이 세상에 왔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천주 성부의 뜻을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셨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의 머리수만큼 의견도 많은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에는 한가지일에 여러가지의 견해가 생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교의에 관한 것이나 윤리도덕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가령 내가 성체성사에 관한 교의를 내 개인의 의견과 판단으로 정할 수 없는 일이다. 동시에 하느님이 주신 계명의 도리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개인 의견이 통할리 없다. 다만 이것이 계명에 어긋나느냐 하는 문제는 그때마다 전문가가 판단만 하던가 혹은 양식이 있는 사람이면 인간 도리에 맞게 판단할것이다. 때로 이것이 그 어느항에 속하는지 아닌지 혹은 이것이 내 양심의 소리로 선이든가 악이든가를 판단할때 문제가 생기게된다.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실천적 판단을 내리는 기관이고 모든 사람은 양심을 따라 살게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매사에 주관적인 자기 양심만을 따라 행동할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요소가 되고 혼란을 무질서로 무질서는 죄악으로 유인된다. 한 단체를 이끌기 위해서는 거기에 이끄는 으뜸이 있고 그 으뜸은 단체의 공동선을 위해 다스리게 된다. 교회는 교회를 다스리는 으뜸이 있고 그 으뜸은 예수님의 지상의 권리를 받고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일을 세속적인 측면에서만 판단한다. 세속적인 판단이란 교회가 성신의 감도하심으로 이끌어진다는 것을 잊고하는 행동이다. 만일 교회가 인간적인 능력만으로 다스려졌다면 2천년간의 그 많은 으뜸들의 인간적 실수로 교회는 멸망하고 말았으리라.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고 성신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칫 잘못 행동 할 때 갈라지고 파벌이 생긴다. 나는「아폴로파」다, 나는「베드로파」다, 나는「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어댄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단 말인가. 또 베드로나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인가. 하느님의 교회는 말재주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누가 말재주나 자기의 인간적인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 다닌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을 것이다(꼬전 1장10~17) 우리는 우리를 이끄는 교회 으뜸의 뜻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