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의 소란에 의해 약간 질서를 잃었던 라운지는 이제 또 한 번 딸그락거리는 소리로 대강 점심시간이 마쳐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술김에 엉엉 울었던 경민이가 눈이 뻘겋게 부어가지고 고개를 들었을 때 형화는 보기가 민망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밖엔 없었다.
그리고 생각난 듯이 웨이터에게 차게 식힌 콜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경민이 형화에게 죽은 누이와 닮았다는 이유로 자꾸 치근덕스럽게 따라다니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형화는 그게 그리 싫지는 않았다.
무어든 하고 싶고 사고 싶기만 하면 경민을 만났을 때 모두 실현되니 싫을 리가 없는 일이었다.
퇴근 후라든지 공휴일에는 특히 경민의 차를 타고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반복은 사람에게 싫증을 남기게 마련이어서 형화가 그 일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는 무렵이었다.
마침 형화는 경민이가 상대하는 여자가 형화뿐이 아니라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그녀들에게 모두 죽은 누이를 닮았다는 이유를 붙여 접근했던 것이다. 형화는 치사하다면서 치를 떨었다.
그러나 경민은 태연했다.
사실이 그랬노라는 것이었다.
거리거리를 지날 때마다 결혼할 나이 즈음의 여자를 만날 때마다 경민은 누이의 환상에 사로잡혀 그녀들에게 접근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경민이가 형화를 처음 만났을 때와 거듭 만날 때의 느낌이 점점 달라져서 급기야 형화에게 참새라는 별명을 부쳐주게 되었다.
-너는 너무 말이 많아.
말수가 전혀 없었다는 누이에 대한 기대가 형화에게서 사라질 때마다 경민은 이렇게 비난을 해왔다.
그리고 몇 번 경민이 형화의 어깨를 잡았을 때 홀쭉한 어깨살에서 뼈마디를 느꼈던지 언젠가부터는 이래저래 참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문했던 콜라가 나왔다.
형화는 콜라잔을 경민 앞으로 밀었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경민은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약간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크윽하고 트림을 해댔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던 사람들이 경민과 형화를 훑어보고 지났다.
-뭐야?
경민은 혹시나 그들이 자기 때문에 방을 나가는 건 아닌가 해서 형화를 쳐다보았다.
-점심시간이 끝나서 나가는 사람들이야.
그제야 경민은 안심한 듯 나머지 콜라잔을 비웠다.
-형화도 사무실에 들어가지.
경민은 의외로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누나 산소나 돌아보고 들어갈 테니까.
-산소?
형화는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누이는 분명히 화장을 해서 산에 뿌렸다고 했는데 산소가 있다니 금시초문인 것이다.
-헛 헛 헛.
경민은 크게 웃었다.
-참새 아가씨、이 세상천지가 모두 누이의 무덤이란 말씀이오.
그러더니 경민은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거리를 쏘다닐 때마다 나는 누이를 찾고 있거나 또는 만나는 기분이라구 이제 알겠어?
경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이건 선물이다.
경민은 돌돌 말린 오징어를 형화에게 던지더니 획 나가다 말고 카운터에서 식사값을 치루고는 급히 사라져버렸다.
형화는 오징어를 한 손에 들고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서 사무실까지 닿았다.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계단을 걸었는지 기억에 없을 만큼 형화는 충격적인 몇 마디에 관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것이다.
오징어, 묘지, 거리, 그리고 이경민. 형화는 경민이를 하잘 것 없는 놈팽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에 대하여 조금은 수정을 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아직도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차를 몰고 누이의 묘지라는 이 거리 저 거리를 배회할 것이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스쳐 지나갈 일은 아니라고 형화는 확신한 것이다.
사무실에는 실제로 며칠 만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전혀 생소한 기분은 하물며 남의 방에 침입해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게 할 정도였다.
-그 냄새 지독한 사람은 누구예요? 점심시간 내내 사무실에 있었던 미스 김이 타자를 하다 말고 물었다.
-그 사람 말도 없이 들어와서 책상 위에 그 책을 홱 던지고는 급히 사라지던데.
형화는 별안간 쿡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기분이 좋아져서 아침에 하던 일꺼리들을 다시 손에 쥐고 일을 시작했다.
그때 김 부장이 이를 쑤시며 사무실을 들어왔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