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의 첫순서가 스피커에서 낭송되자 두 꼬마가 무대에 나타났다.
십구세기 영국의 무희들이 입었으리라 싶은 의상으로 치장하고 나온 두 꼬마는 팔장을 끼고 가면무도회에 참여하러 가는듯 산뜻하게 마이크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관객들을 향해 정중히 절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관객들 사이에서 오, 귀염둥이들 하는 소리가 요요히 붐볐다.
두 꼬마는 똑같이
『엄마 아빠 우리들의 재롱을 끝까지 잘보아 주세요』
하고 마치 글자를 읽어내리듯이 인삿말을 했다. 그런 다음 성심 유치원의 원가를 불렀다. 노래소리가 맑은 냇물처럼 또랑또랑하다. 노래에 맞춰서 손발을 까딱이고 조그만 엉덩이를 살래살래 흔든다. 할 수 만 있다면 무대에 뛰어올라가서 깨물어주고 싶었다.
나는 저걸 그냥 하고 뇌까리면서 혀끝을 잇빨 사이에 밀었다 당겼다 했다. 탐스럽다든가 귀엽다는 감정표출이었다. 나중에 혀끝이 얼얼하든간에 말이다.
두 꼬마의 노래가 끝나자 박수소리가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요란하게 났다. 두 꼬마는 깜짝 놀랐는지도 몰랐다.
다음 순서가 낭송되었다. 관객들은 이제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좀전에는 저들끼리 쑤군대고 성당 유치원이니 예수쟁이 재단이니 하고 잡소리를 은밀하게 지껄이었다. 그러나 이제 부러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동태를 모조리 파악했다. 엉뚱하게도 나의 생각은 이 발표회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성당에 발을 들여놓으리라고 여겼다. 이번엔 조명이 보라빛으로 변했다. 무대를 어둡게 하려는 모양이다. 음악도 경쾌한 곡에서 슬픈곡으로 변했다.
나의 눈은 무대 출구쪽으로 향했다.
무대 양켠으로 묶어맨 휘장의 잘록한 부분으로 얼핏 그것이 보였다.
출구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하얀 카네이션의 주인공이 마침내 나온다. 주인공은 머리에 검은 면사포를 썼고 토끼공지를 달았다. 손에는 제목 그대로 하얀 카네이션을 쥐었다.
주인공은 사뿐히 무대 중앙으로 나오면서
『나는 하얀 카네이션, 여름 가기도 전에 꺽이는 꽃』
노래하며 발레를 한다. 손을 재치있게 놀리며 껑충 뛰기도 한다. 여기에 맞춰서 피아노 반주가 애조를 띈다. 조명의 빛이 차츰 밝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짙은녹색으로 변했다. 주인공은 두 팔로 허공을 저으면서 카네이션을 힘없이 흔든다.
『나는 하얀 카네이션」, 여름 가기도 전에 꺾이는 꽃』
피아노의 반주가 더없이 구슬퍼진다. 음률은 흡사 눈물방울처럼 뚝뚝떨어지듯, 나는 한줄기 뜨거운 액체가 볼 위로 미끄러짐을 느꼈다.
나의 옆자리엔 한 아가씨가 앉아있었는데, 맞닿은 상대방의 억깨가 악간 들먹거렸다.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나는 나 대로 까닭모를 설움이 복받쳤다. 관객들 손에는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피아노의 음률은 더욱 애조를 띄고 주인공은 자기의 슬픈 꽃봉오리를 손에 쥐고 무대 구석진 곳으로 비실비실 가지않고 있다.
『나는 하얀 카네이션, 여름 가기도 전에 꺾이는 꽃』
종언을 고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나의 눈에는 연상되고 있었다. 주인공은 그 정경을 너무도 잘 나타내었던 것이다.
박수소리는 처음의 갑절이나 터졌다. 휫파람과 감탄의 비명소리까지 뒤섞여 났다. 나는 손바닥에서 불이 튀도록 쳐댔다. 사회의「감사합니다」소리가 스피커에서 거듭되었다. 나는 이 넘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어쩔줄을 몰랐다.
옆자리의 아가씨는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하얀 카네이션을 꺾어들 태세라도 취하였다.
감상은 하나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건가.
나의 주위가 온통 카네이션으로 물결치고 그 꽃무리 속에 후딱 뛰어들고 싶은 충동, 그래서 카네이션의 애닲음을 만끽해보고 같이 슬픔을 나누고.
그러나 불가피한 망상이 나는 이같은 망상을 꿈꾸고 그러다가는 현실로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었다.
옆자리의 아가씨는 막이 스르르 내리자 의자에 푹 주저앉았다. 대단한 실망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하얀 카네이션이지 못했다는 그 때문에 그녀는 후딱 눈물을 닦는건가.
나는 그녀에게 얘기를 걸고 싶어졌다 상대방도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을지도 몰랐다.
『아가씨 저 좀 봐요』
나는 손을 그녀의 어깨위로 가져갔다. 그녀는 흠칫 돌아본다. 희미한 형광등에 비친 나의 얼굴을 식별하자 재빨리 참으로 재빨리 나의 손을 떨쳐버리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무슨 망칙한 이따위 사람』
그녀의 반응이란게 겨우 이모양이었다. 나는 금방 하얀 카네이션의 설움에 찌들어 있었지만
『도도한 아가씨군 제까짓게 얼마나 잘났다구』투덜댔다.
그녀는 다시 힐끗 돌아보며
『점잖치 못한 소리 작작해 임마!』
날카롭게 쏘아부쳤다. 누가 듣지나 않았는지 나는 주위를 휘둘러봤다. 귀 가진 사람치고 어찌 못들었을텐가. 바로 등 뒤의 사람이 나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키는 것이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돌아보았다. 풍체좋은 노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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