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인가 성취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사회구조의 극적인 변화에 관해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적어도 집이라도 한채 짓고자 하고 책 한권 쓰기를 원하기도 하며 기계를 발명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또 트로피를 따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타인을 위해 무슨 가치있는 일을 행하였을 때 만족하는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생활에 공헌한 자기자신에 대해서인 것 같다. 그래서 늙은 후에 사람들은 세계역사 발전이나 국가나 가정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그것으로 자기기쁨이나 행복슬픔의 원천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또 신자라면 신자로서의 자기 특수소명 즉 타인에게 선을 행해야 하는 소명을 행했을 때 그것이 자기 기쁨이나 슬픔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좋은 충고를 해주고 위로를 주며 한 두가지 악을 뿌리치고 나아가선 고아나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며 여러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한다는 등의 소명을 채운 그것으로 자기행복과 슬픔으로 생각한다. 국가나 사회교회와 세계에 유용한 사람이 되고자 하고 사실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자칫하면 이러한 욕망이 목적 지향적인 사회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가치의 기준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은 뜻있는 일을 바라고 사실 그러한 좋은일을 행하지만 그 뜻있는 일의 결과를 자기 높임의 기준으로 삼아버린다. 그래서 자기가 성공을 가질뿐 아니라 자기가 자기의 성공이 되어 버린다.
소위 저명인사를 소개할 때 우리는 그분의 경력 즉 그분이 이룬 일의 성취를 나열한다. 그래서 그 많은 일의 성취가 바로 그 사람의 가치로 생각한다. 이런것은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더욱 길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의 결과에 압력을 받기 시작하면 차츰 다음과 같은 그릇된 확신을 갖게된다. 즉 생활이란 어떤 사람이 자기의 가치를 평가해서 점수를 적어나가는 커다란 게시판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영혼을 점수매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팔아버리게 된다. 이것이 곧 우리가 세속하에 있고 세속의 것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는 세속이 만들어주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다른 사람들이 높은 점수를 주었기 때문에 똑똑한 사람이고 다른사람이 감사하다고 말해주기 때문에 유용한 사람이고 다른사람이 좋아해주니깐 사랑스런 사람이고 다른사람이 절대 필요한 사람으로 취급하니까 소위 요인(要人)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성공을 가지고 있으니까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행한 일의성취나 결과를 자존의 평가로 인정하면 할수록 우리들은 안정된 삶을 못산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의 최후 성공이 이룩한 그 기대에 맞추어 살 수 있을지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생활속에는 악마적인 쇠사슬이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성공에 따라 자라나는 그들의 욕망이다. 이 암흑의 능력이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을 파멸시켰다.
우리의 생활은 점점 최고의 것들로 지배를 받는다. 가장 높은 탑을 자랑하고 가장 빠른 경주자, 가장 긴 다리, 가장 좋은 학생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공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그 밑바닥에는 뿌리깊은 자아 극소평가가 도사리고 있고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 환상을 벗겨버릴 것이고 또 세상이 믿었듯이 그렇게 세련되지도 않았고 그렇게 선하고 사랑스럽지 않다는 것을 폭로해 버릴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살게된다. 가장 자기에게 정직했던 한순간에 사람들은『모든 사람들이 나는 고요하고 안정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참으로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기나 했으면 … 』하고 고백할 것이다.
우리 생활에서 의기 소침해지는 그 근거에는 이 성가신 자아회의가 있다. 자기 연약함을 알게되는 이 마음을 썩이는 공포가 바로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게 하고 창조적인 참여를 못하게 한다.
우리가 자신을 세상의 판단에다 내맡기게 될 때 우리는 휴식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자기긍정과 타인의 칭찬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는 자아부정 때문에 낮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되고 나아가선 고독해지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는 우정이나 사랑이란 불가능해진다. 우정이나 사랑이란 상호의 약점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행동이 내적 평화의 표현이 아니고 두려움의 표현이 될 때 우리는 자아가 만든 환상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