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미안 신부로 유명한 태평양의「모로카이」섬에서 나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30년동안 귀한 피를 흘리고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고 하느님께 돌아간 마리안 수녀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마리안 수녀의 젊은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않다. 1830년 1월 23일 독일의 작은도시「햄번ㆍ하임」에서 6형제의 막내딸로 태어나「발바라」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받았다. 온 가족이 미국의「뉴욕」주에있는「유티카」에 이민한 후 수녀원에 입회할때까지 거기서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집안일을 돌보며 살았다. 이러한 생활속에 발바라의 인격은 연마되었다. 1862년 11월 19일 그녀가 26세때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독립하고 자유의 몸이 된 후 성프란치스꼬 제3회인 성안토니오 수도원에 들어가서「마리안」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열심히 수련기간을 끝마친후「시라큐스」와「오스웨고」에 있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다가 1875년「시라큐스」의 성 요셉병원의 원장으로 임명받았다. 거기에서 귀중한 활동을 했으며 동시에 그 후에 하와이에서 필요한 많은 실무상의 지식을 배웠다. 마리안 수녀의 통솔력과 우수한 천분을 장상들은 처음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활동엔 평정감과 옳은 분별력이 있고 또 굳센태도를 가진 한편 온화한 마음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동료수녀들과 매일 접촉하는 사람들을 돕고 주위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성격이었다. 1877년 12월 27일 관구장이 되고 1881년 다시 재임되었다. 마리안 수녀가 관구장으로 있을때 소왕국이었던 하와이의 외무부장관 겸 위생국장인 월터 기브슨씨로 부터 하와이에 있는 나환자들의 치료를 위하여 수녀들을 파견해달라는 요청이 케케만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1883년 1월에 레오놀 신부가 미국에 건너가 50여 수녀원을 방문하고 나환자를 위해 수녀 파견을 요청했으나 별성과를 얻지못하고 있던중 마리안 수녀가 있는 성안토니오 수녀원을 방문했다. 그때 수녀들은 긴 시간동안 무서운 위험과 큰희생이 다른수녀들에게 돌아갈 부담과 그리스도 사랑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논했으나 물론 그리스도의 소리가 승리했다. 그래서 6명의 수녀가 레오놀 신부의 호소에 응해서 하와이로 가기로 했다. 1883년 10월 22일 수녀들은 수녀원을 떠나카 빠오라니 여왕외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으며 「호노루루」에 도착하였다. 「모로카이」섬은 수녀들에게 너무 어려운 곳이라서「호노루루」분원에서 얼마동안 일하기로했다.
1888년 다미안 신부의 의뢰로 정부와 주교는 3명의 수녀가「모로카이」로 건너가는 것을 허락했다. 수녀들은 열심히 봉사했고 마리안 수녀는 죽을때까지(1918년) 다만 나환자를 위해서 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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