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전야에 나는 성세를 받았다. 전쟁을 갓 치르고 난 그 당시, 죽음은 나의 전인식이었으며 이 땅 위에 늘비하게 뒹굴던 피난민 그리고 남북 양쪽 군인들의 시체들이 촌보의 양보도 없이 내 눈 앞에 버티고 남아 있었다. 영세를 받던 순간 나는『이 전쟁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천국에 받아들여 주십시요』라고 기도하였다.
극히 상식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 기도는 그러나 다분히 혁명적인 저항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죄를 짓고 죽은 인간의 영혼이 영원무궁토록 벌을 받는다는 영죄이니 지옥이니 하는 개념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식의 선언이 이 기도 속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사람들의 불합리한 죽음과 동일개념으로 인식되었던「전쟁」이 15세의 내 심장 깊숙이 박아놓은 상처는 치유의 방도를 모르고 심화되어 갔다. 그리고 그 당시에 내가 배운 가톨릭 교리는 주기에는 너무도 비정하다고 느껴졌었다. 바닷가의 모래알들, 가을 하늘에 흩날리는 낙엽 같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시시각각으로 연옥과 지옥의 끓는 기름솥 안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내가 15세에 배운 교리의 요점이었다. 평화와 구원을 약속하는 사랑의 교회가 아니라 분노와 죄벌을 강조하는 공포의 교회를 배웠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원죄와 본죄를 항시 통회하여야 한다는 죄의식을 지나치게 나 자신에게 강조한 나머지、내 영혼은 세심증과 죽음과 공포감으로 인하여 피투성이가 되어서 살아야 하였다.
이렇듯 어두웠던 내 신앙 태도에 밝은 광명을 준 사람은 바로 내 어린 딸들이다. 현대의 교리 선생님은 옛날에 나를 가르치던 교리 선생님과는 아주 다른 모양이다. 15세 13세 11세에 해당하는 나의 딸들은 이렇게 말한다.『기름이 끓는 지옥이란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서 불안해하는 마음、남을 미워하는 마음、하느님을 부정할 때의 외로운 마음이 곧 지옥입니다.
지옥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어쩌면 이 말은 시시로 내가 그들에게 가르치었던 것을 그 애들이 내게 되풀이해서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섯 살 된 막내는 말한다.『나는 하느님이 되고 싶어요. 신부님 수녀님 같은 하느님요. 나는 여자애니까 수녀 하느님이 될 거예요』
샤르트르의 동거인인 시몬ㆍ드ㆍ보봐르는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 보봐르의 선풍적인 소설「아주 평온한 죽음」은 그녀의 어머니가 임종하는 죽음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천국에 가고 싶죠. 그러나 나의 딸들이 모두 함께 있는 천국이어야죠. 나만의 천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나는 최근에 어린 딸들과 함께 동심에 어린 순박한 진리를 듣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하여 내 세심증을 치유하기에 이르렀다. 또 죽음에 관련된 많은 동서양 철학가들의 글, 가령「아주 평온한 죽음」같은 것을 읽으면서 죽음의 문제는 마음의 밀실 속에 은밀하게 감출 성질의 것이 아니라 더욱 개방시켜 토론하고 탐구해야 할 명제라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언제이고 드디어는 죽으리라는 의식과 완전히 합치하는 나날을 살고자 노력한다.
나의 죽음이 완벽하고자 하는 소망의 달성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고백하여야 하리만큼 죽음과 밀착된 삶을 살고 싶다. 이러한 내 소망은 내가 철저하게 선공을 닦는 신앙인이라는 뜻의 표현은 결단코 아니다. 나는 내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죄를 관념적으로 혹은 실제로 범하며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생명을 갖고 태어난 모든 인류가 한 명도 남김없이 전체로서의 구원을 이룩하는 하나의 신비체 안에서 나도 역시 구원된다고 하는 것을 확신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온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하다는 이론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에서만도 1만여 명의 순교자들이 진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죽었는데 그분들이 흘린 피가 그분들 자신만의 구원을 위한 일회적 의미에 그치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반복하며 살 사람들이 있다. 남녀간의 사랑, 물욕과 명예욕을 모두 누르고 오로지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으며 시시각각으로 자애심과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막내딸애가 말하는 소위「신부 하느님과 수녀 하느님」같은 분들이다. 그분들의 인고의 생애가 과연 자기 자신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일까? 아니다.
그리스도와 순교자들과 수도자 및 사제들의 삶과 죽음은 바로 나처럼 죄악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영혼들 한 명 한 명을 모두 구원하여 종국에 이르러서는 온 인류가 한 명도 남김없이 하나의 신비체로서 전면적으로 구원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 생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성소받은 사람은 타인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죽인다.
이제 또 위령성월을 맞이하면서 언제나처럼 나는 변함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기도한다.「죽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순교자와 수도자 및 사제들의 선공을 힘입어 일체로서 영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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