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어느새 아래로 기울기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밀폐된 고층 건물의 이중 창문을 헤치며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직장엘 나오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은 휙휙 스쳐 달린다.
형화는 하루 종일 타자 찍기와 엽서 적는 일로 벌써 해가 떨어질 만큼 시간을 보낸 것이 문득 새로와져서 의자를 걷어내고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알미늄 샷시로 규격이 일정하게 만들어진 창틀은 한 군데도 남김없이 밀폐되어 있었다. 환기통의 덜덜거리는 소리가 서랍 여닫는 소리나 종이 넘기는 소리뿐인 조용한 사무실 어느 구석으로부터 아주 조그맣게 들려왔다.
창은 깨끗이 닦여 있었다.
근간에 건물 꼭대기에서 연결된 줄에 매달려 한층 한층씩 유리를 닦아 내려가던 인부 한 사람이 십육 층에서 실족하는 바람에 큰 사고가 일어나 회사 안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그 인부가 길바닥으로 추락하자 머리 부분에서 피가 제일 많이 흘렀고 온몸은 거무죽죽한 작업복 속에서 흐느적거릴 만큼 부서졌더라는 말이 있었다.
마침 그때 지나가던 신문사 차가 있었던 연유로 이 문제는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 덕분에 그의 가족들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과 동정을 얻어 회사로부터 거액의 보상금을 받아냈었다.
결국 보상금을 요구대로 내주고 말면서도 회사 측에서는 조금이라도 덜 주려고 애쓰기도 했는데 가족들은 그때 관을 들고 회사 정문에 와서 이틀 동안 꼬박 농성을 해댔었다.
이미 그때는 그가 죽은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으므로 회사는 사람 썩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형화는 그 밀찍한 길바닥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까맣고 동그란 사람의 머리들이 분주히 오간다. 네모난 상자와 같은 여러 모양의 차량들이 줄을 지어 달리고 있다. 집들의 지붕은 각양각색으로 기와지붕 판자지붕 또는 고층 건물의 널찍한 옥상도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남산에 올라가서 한 번 멀리 내다보아. 다닥다닥 붙은 집들, 그리고 그 안에서 모여앉아 사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를 금방 알 수 있을거야. 그 많은 사람들이 먹는 쌀은 또 다 어디서 만들어져 오는지…모두가 엄청난 양이라구. 거기 살아가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먹고 입는 것들, 그들이 원하는 것들, 그들의 만드는 것들.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도.』
정말 기식이의 말처럼 저렇게 다닥다닥 붙은 집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가.
형화는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줄을 이은 차 안에 꼭꼭 틀어박혀 앉았을 사람들, 그리고 건물이나 집 속에 들어앉아 있을 사람들의 제각기의 생활을 생각하고는 어지러웠다.
뿐 아니라 그들이 모두 제각기 자기 나름으로 죽어가는 것을 생각하며 또 어지러웠다.
그것은 마치 지금 형화가 서 있는 곳에서 멀찍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느끼는 앗찔한 현기증과도 많이 닮았다.
얼마나 멀고 얼마나 많은 모습인가.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먼 일이면서도 저렇게 많이 살아다니는 사람만큼이나 허다한 일인 것을.
햇살은 형화를 상기시켰다.
어느새 형화의 볼은 붉게 물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은 관 속의 흉흉함이 아니다. 그리고 부패하는 고약한 냄새도 아니다.
형화는 햇살을 잡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유리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매끈하게 닦여진 창은 더는 손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죽음은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저 움직임 속에 저 살아있는 소리 속에 담겨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 부장은 어흠, 하는 마른기침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담배재를 떨면서 형화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형화는 이제 두려워지지가 않았다.
일 분 일 초를 놓치지 않고 일을 하게 하는 김 부장 앞에 벌써 떨던 것이 오히려 불쾌하다는 생각이었다.
『이 일은 회사를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을 통해 얼마나 나를 확인하고 발전시키는가에 있는 것이다. 형화는 아직까지 그것을 모르고 지내왔던 것이다.
일은 시켜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손으로 선택해서 하는 것이다.
결국 김 부장의 기침소리에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형화는 이제 기꺼이 책상 앞으로 걸어와 남은 일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평범하고 단순한 일로 연속되어진 하루였지만 형화는 도무지 이날이 다른 날과 같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무언지 확실치 않은 모든 것을 내뿜는 듯한 하루였던 것이다.
막연히 모든 것을 형화는 짚어본다.
그리고 가방을 챙겼다.
남자 사원들은 왁자지껄하면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옷들을 입거나 크게 하품을 해댔다.
싫어하던 그 사람도 크게 하품을 했다. 그는 이미 일에 이끌려든 사람처럼 보였다. 누군가 라디오를 틀었다.
퇴근하는 분위기는 천박스럽기는 하지만 쿵작거리는 흥으로 더욱 고조되어 갔다.
잠시 후 저녁 뉴스가 방송되기 시작했다. 형화는 서랍의 열쇠를 잠그고 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사무실을 나가다가 거의 끝나가는 뉴스 한 토막에 문득 귀를 기울였다.
『오늘 아침 여덟 시 삼십 분경 제일한강교 북측 입구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해 한 사람이 크게 다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망자는 K대학 생물학과의 김종후 교수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길에 변을 당한 것입니다.…
유해는 자택에 안치했으며…』
형화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발길을 멈췄다.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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