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공자님은 계로(자로)의 질문을 받으시었다.『감히 죽음에 대해서 묻자옵나이다』공자님은 미연히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하시었다.『세상에 어찌 태어났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생사일여의 경지에 있으시면서 이와 같이 초연하게 대답을 보류하신 공자님의 태도는 계로를 포함한 모든 후생들에게 죽음의 문제가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주신 계시적 표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계시에 드러난 죽음의 불가사의를 문학 특히 한국문학의 측면에서 검토해 보리라는 계획은 내 입교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 내 하고자 하는 숙제로서 구체화되어 왔다.
버트란드·럿셀이 지은「철학의 문제들」이라는 저서는 죽음 의식에 대한 내 천착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도록 격려하고 이끌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거기에서 럿셀은 이렇게 말한다.
어떠한 사람도 의심할 나위 없는 그처럼도 완벽한 지식이란 게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직설적이고도 자신만만한 대답을 하는데 장애를 느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올바른 태도로 철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럿셀이 이 말을 통하여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모든 기존 이론 위에 일단 의문의 안티테제를 던져봄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하는 학문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우선 나는 내 필생의 업이 되어버린 문학을 그 목적과 기능면에서 의문하였다. 과연 문학의 목적과 기능은 종래의 이론대로 교훈성과 쾌락성에만 한정되는 것일까? 나의 주장은 여기에 단연코 더 하나 탐구적 기능을 첨가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학은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즐거움을 주려고만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가르친다거나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모두 작자의 입장이 아니라 독자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효과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작자자신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다. 작품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작자에게는 그와 같은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도록 그를 몰고가는 원동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류가 다함께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하는 가장 원초적인 물음에 대한 도전의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상당수의 작가들은 이 문제를 일반인들이나 마찬가지로 회피하려 한다. 그리고 설사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 몰라서 인간이 생활하고 움직이는 현상적 사실만을 표면적으로 추적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참으로 작가다운 작가는 현실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 궁핍이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백년 뒤이건 2백년 뒤이건 자기 고민의 실체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묵묵히 자기 작품을 완성한다.
이러한 경우에 문학의 교시적 기능이나 쾌락적 기능은 한 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작가 자신에게 오히려 초점이 맞추어져서 작가가 힘쓰는 인간 본질에 대한 해명 즉 탐구적 기능에 더 큰 비중을 주게 된다. 작가가 이 기능에 충실할 때에 비로소 그는 철학자나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현명하듯이 문학을 방편으로 하여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해 집착하고 탐구한다. 그러면 문학의 탐구적 기능에 의해서 해명을 기다리는 그 인간 존재는 어떤 관점으로부터 탐구되어야 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공자님과 그 제자 계로와의 대화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공자님 대답의 참뜻을 모르면서 공자식의 표현에만 관심을 쏟는 작가가 있는 반면에 계로의 질문처럼 죽음을 문제해결 의한 출발점으로 붙들고 있는 작가도 없지 않다. 나는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에 눈을 돌려 계로의 입장에서서, 죽음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우리의 문학사를 정립하고자 하는 고달픈 일에 골몰하여 왔다. 그리고 이 작업의 과정에서 내가 얻어낸 것은 좋은 작가의 좋은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완전한 가치로 승화시키도록 이끌어준다는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오늘 나는 원고지 1600매에 달하는 긴 글을 탈고하였다. <한국 문학에 나타난 죽음의식의 사적 연구>라는 제목의 저서이다. 촌분의 휴식없이 아침을 맞이하곤 했던 많은 밤들에 내 오성을 전적으로 통어하며 일사불란한 논리의 체계 위로 나를 밀어주던 존재의 확인-그것은 돌아가신 어미님의 영혼이었다.
이 무형의 존재자가 나와 함께 작업하지 않고서도 내가 이 글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나는 결단코 상상해볼 수 없다.
아침에 나는 내 큰딸애의 손목을 꼭 잡고 어머님의 영정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어머니 로사가 전국학생대항 영어웅변대회에 나갑니다. 제게 너무 밀린 일이 있어서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어머님께서 이 애를 보호하시고 침착하게 이야기하도록 살펴주십시오』
온 가족이 초조해져 있는 저녁밥상 머리에 로사가 제키의 반만 한 번쩍이는 특상의 트로피를 안고 나타난 것은 순전히 어머님의 영혼이 그 애를 지켜주셨기 때문이라고 나는 또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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