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 때는 아무 대비책이 없었기 때문에 정처 없이 피난 다니고 쫓겨 다니느라고 3개월 동안 정신없이 지냈다.
9ㆍ28 수복으로 겨우 숨을 돌리게 되자 서울 본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자리를 제대로 잡기도 전에 정세는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미리미리 채비를 차려 수녀들 대부분이 대구로 부산으로 뿔뿔이 헤어져 갔다. 나도 서울서 3일 만에 대구 수녀원에 도착했다. 겨우 얻어 탄 기차가 운행이 순조롭지 못해 사흘씩이나 걸린 셈이다. 여기서 6개월 머무는 동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27육군병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일선 지구에서 부상하여 응급 치료만 된 상이용사들을 임시 수용하는 곳이었다. 하루에도 2백 명 3백 명씩 들이닥쳤다. 그러나 얼마 있지 못하고 수용 시설이 부족한 관계로 대구 부산 등지 병원으로 보내어지곤 했는데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마음 아픈 광경이었다.
어떤 병실에는 동상 환자들과 파편으로 부상하여 손발이 썩어 들어가는 환자들만 수용되어 있었다. 그런 병실을 찾아 위문을 한 날은 코에서 계속 시체 냄새가 났고 속옷에까지도 이런 악취가 배어 어딜 가나 이 냄새에 젖어 지냈지만 가장 보람 있게 선교를 한 곳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의 죽어가는 사람들이어서 아무런 희망을 가지지 못했지만 인간적인 작은 눈길을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곤 했다.
여러 병실을 방문하노라면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만난 듯 여기저기서 수녀를 찾곤 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자기의 신분을 말하며 영세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의 30% 이상이 그전에 가톨릭과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땐 내 몸이 50갈래로 나뉘어 쓴다 해도 모자랄 지경으로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지금도 군은 전교의 황금어장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그때는 더 실감이 있었다. 어딜 둘러보나 뿌려진 씨들이 버려진 채 있었고 무르익은 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를 가꾸고 거둬들일 일손이 부족한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주님의 넘치는 자비와 안배로 대구 수녀원에는 메리놀 안 주교님이 계셔서 교리서、기도서、성물을 준비해 주시며 얼마든지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라고 하셔서 감사한 마음으로、그분의 뜻을 따라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수녀원 원장 수녀님은 보육 원아들을 위해 미군들이 차로 실어다주는 우유、과자 등을 여유있게 주시며 대구 시내 육군병원 병동에까지도 분배해 주던 일은 흐뭇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병동에서 위급한 환자들을 돌보다 보면 급하게 신부님을 청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지금의 추기경님께서 그 당시 부제로 주교관에 계시던 때였는데 많은 주선을 해주신 일도 잊지 못하겠다.
그전 유스티노 신학교가 임시 성당으로 쓰여 걸음을 걸을 수 있는 환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송되기 전까지 모두 이 성당에 나가곤 했다. 어떤 동기에서든 성세를 받고 신앙생활로 뛰어든 그들은 오직 의지할 곳은 주님밖에 없다는 듯 열심으로 기도하고 성당에 나가곤 했다.
지금은 그분들의 생사와 신앙생활이 어떠한지 궁금하지만 그분들의 꾸준한 믿음과 신앙생활을 위해 기도 중에 기억할 뿐이다.
이렇듯 영육을 함께 돌보아가며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실상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그 당시는 지금보다 여건이 더 어려운 처지였는데도 일하기가 수월했던 것은 주님은 어떤 처지에서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깨우쳐 주시며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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