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5년 기해년(1839)은 신유년(1801)에 이어 또 한번 한국교회가 바쳐야 했던 혈제때문에 신유년과 더불어 깊이 기억되어야 할 해이다.
신유박해 이후 물론 박해가 전혀 없은 것은 아니다. 비록 규모가 작고 그 기간이 짧았다 할지라도 을해년(1815)에는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박해가 있었고 정해년(1827)에는 주로 전라도 지방에 박해가 일어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인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분명히 점점 관용적인 경향이었다. 그 일례로 임진년(1832)에 교우들에 대한 특사령이 내린적이 있다. 이 특사령에는 불행하게도 배교란 전제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여하간 이 특사령의 덕택으로 많은 교우가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신유년과 마찬가지로 기해년의 박해도 대박해의 하나로 간주된다. 대박해라고 할 때 우선 그 규모가 전국적이고 희생자의 수도 엄청났음을 의미하지만 이 밖에도 절차상 이 두 특징을 드러내고 있으니 즉 박해가 임금의 장엄한 칙서로서 시작되었고 끝을 맺었다는 점인데 박해를 끝낸다는 정식선고가 이른바「근사륜음」이라고 불리는 칙서이다. 기해년 박해의 시작을 알리는 칙서가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이 3월 5일(양 4월 18일)이었고 박해의 종말을 알리는 소위「척사윤음」이 반포된 것은 10월 18일(11ㆍ23)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박해는 반드시 이 기간 동안에만 있었고 그것을 전후하여 결코 박해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니 도리어 신유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박해는 이미 그전에 일어났었고 그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기해박해」라고 할 때 기해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오 이 해를 전후하여 일어난 박해를 일괄하여 총칭하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더욱이 박해를 시발시키는 칙서는 요컨데 사형령이고 정부가 막다른 골목에서 취한 최종의 조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옥은 벌써 잡혀온 교우들로 가득 차있고 그들에게 배교를 권고해 봤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고 보니 이제는 더 이상의 체포를 중단하느냐 또한 잡혀온 교우들도 석방할 것이냐 아니면 죽일것인가 양자택일의 곤경에 이르렀음을 충분히 예측케 하는 것이다. 과연 기해년 3월 5일 이때에는 이미 정부가 최종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감옥은 교우들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3월 5일 이전에 잡혀갇힌 교우들은 대개 어떠한 이들이었을까. 이미 무술년(1838)말 12월에 서울에서 복자 권득인과 그의 가족 및 동료 17명이 잡혔다. 기해년에 들면서 정월말쯤 원주와 제천에서도 교우들이 잡혔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체포는 산발적이었고 체포가 본격화하게 되는것은 2월 24일(4ㆍ7)부터이다. 이날 서울에서 잡힌 교우는 20명 가량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는 복자가 된 유명한 남명혁 과 이광헌 두 가족이 들어있다. 이광헌 아버지와 함께 13세와 8세의 두 아들이 잡혔는데 열세살짜리는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며칠후에 서울 봉천동에서 복녀 허계임 세 모녀와 또한 같이있던 세 명의 여교우가 자수하였고 3월 2일에는 둘 다 복녀가 된 궁녀였던 박희순과 전경협이가 붙잡혔다.
3월 5일 전의를 거느리고 문안차 입궐한 우의정 이지연은 이 기회에 천주교인에 관하여 대왕대비 김씨와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대신은 대왕교도가「무부무군」이니「오랑캐나 금수만도 못하다」느니「죽기를 좋아한다」「역적이다」「삼강오륜이 없다」는 등 의례의 비방과 중상을 되풀이 하였고 또 서울이 이와 같으니 지방은 말할 것도 없으며 듣건데 강원도에서도 체포된 자가 많다고 하여 천주교가 바야흐로 치열해졌음을 강조하고 나서 그 구체적인 근절방안으로서『좌우 포장에게 사찰을 더욱 철저히 하도록 명하고 형조 판서에게는 매일같이 재판을 열어 뉘우치지 않는 자는 사형을 처하게 하고 또한 이러한 뜻으로 지방에도 공문을 보낼것이고 서울과 지방이 다시 오가작통법을 세워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게함이 어떠합니까』하였더니 대왕대비가 즉시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왕대비도 천주교에 관하여 일가견을 피력하였는데 놀라운 것은『천주교도를 버려두면 나라가 망할뿐더러 인류가 전멸할 것이다』또는『신유년의 탄압이 좀 지나쳤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와서 보니 도리어 덜한 것 같다』는 등의 말로 천주교를 대신보다도 일층 가혹하게 비방하였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대왕대비는 대신이 언급하지도 않은 궁녀에도 언급하여 말하기를『듣건대 궁녀 출신이 일전에 잡혔다는데 이후로 한때 궁녀를 지낸자 뿐 아니라 현재 궁녀일지라도 그 증거가 확실하면 그 궁의 대표에게 고한후에 잡아도 좋다』고 지시하였고 이어 성물에 대하여『만일 그러한 물건이 발견하면 출처를 캐내서 그 사람이 비록 교우가 아니더라도 무거운 형으로 다스리라』고 하였다. 이때 대왕대비는 순원왕후 안동김씨로서 불과 10여세의 어린 헌종의 조모이다. 안동 김씨는 시파로서 천주교에 대하여 관용적이었고 대왕대비 자신도 그러 했었다. 그러면 대왕대비가 왜 급작스럽게 박해자로 변해버렸을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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