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손자 헌종을 후견하며 천주교인들에 대해서도 관대하던 순원왕후 김씨가 갑작스레 그들의 박해자로 둔갑한 것은 임금의 외가인 풍양조씨 벽파와의 세력다툼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순원왕후는 1789년 안동김씨 조황의 딸로서 태어났다. 13세때 순조의 왕비로 들어가서 슬하에 2남3녀를 두었는데 차남이 일찍 죽게되어 아들로서는 장남만이 남았다. 이가 바로 효명 세자이다. 1827년 순조는 이때 40세 미만의 아직 젊은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력은 날로 쇠약해져서 이제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용기와 의욕을 상실해버렸고 그래서 하루빨리 정무의 걱정에서 벗어나 여생을 조용하고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왕세자로 하여금 대리로 정사를 보게한 다음 자신은 서서이 수원의 별장으로 은퇴할 생각이었다. 1830년 임금의 은퇴준비도 거의 완료되었을 무렵 세자가 돌연 심한 각혈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대궐의 백약도 무효였다. 끝으로 전국에서 명의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 중 하나가 정다산이었다.
다산은 1818년 귀양살이 18년만에 강진적소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아직 완전히 사면받은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고향인 마재에서 사사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므로 그가 입궐을 할 수도 없고 더구나 임금앞에 대령할 수는 없었다. 세자의 임종이 임박하게 되자 임금은 결국 다산을 복관시켜 입궐케하였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어서 제아무리 다산의 능숙한 의술로써도 세자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다.
며칠후에 왕세자는 세상을 떠났다. 세자가 생전 정사를 맡아보았던 관계로 그의 장례식은 비단 왕세자로서뿐만 아니라 정식 임금으로서의 국상을 치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국상이 거행되는 동안 관경전에 불이나서 자궁(임금의 관)이 반이나 타버렸다. 이 사건은 불길한 징조로 간주되었다. 헌종때에 효명 세자는 추존되었고 이래 익종으로 불린다. 비록 4년이란 짧은 치세기간이었으나 익종은 현재를 등용하고 민정에 힘쓰며 현명하게 정사를 보았다. 1832년 임금의특사로 교우들이 귀양에서 풀려난 것도 아마 형옥을 삼가한 익종의 간접적인 영향일것이다.
익종은 후사를 남겼는데 이가 바로 익종이다. 익종이 관례한 것이 1819년의 일이고 이때 풍양조씨 만영의 딸 신정왕후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이를 계기로하여 세자비 조씨 일족과 안동 김씨 일파와의 세력다툼이 시작된다. 순조도 그의 치세 34년째인 1834년 결국 승하하게 되니 그 뒤를이어 익종의 아들이 즉위하여 익종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헌종은 아직 8세의 어린나이였으므로 그의 조모인 순원왕후 김씨가 발을 들이고 정사를 대신보게되니 이렇게 정권은 계속 안동 김씨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뿐더러 3년후에는 어린 헌종에게 같은 김씨 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게 함으로써 세도정치의 기반을 일층 굳혔다.
안동 김씨는 시파에 속하고 그래서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벽파와는 달리 천주교인에 대하여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그래서인지 헌종 치세 초기에는 대신들도 천주교를 상관하려 하지않았고 가능한 한 임금이 성년이 될때까지 현상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대신들 중에서 대왕대비의 섭정을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의 오빠 김도근이었다고 한다. 도근의 호는 황산. 그림을 잘그렸고 시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천주교인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황산이 점점 몸이 쇠약해져서 결국 정계에서 은퇴해 버렸고 그렇게되자 정사의 정권은 거의그때 우의정인 이지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지연은 개인적으로 천주교를 미워할뿐더러 풍양 조씨의 세도를 업고 대왕대비가 천주교도를 죽이지 않는다고 불평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형조판서는 조병현이다. 그는 천주교인을 미워하기는커녕 언제나 그들편이었고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그들의 목숨을 아끼고자 배교를 권해 마지않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형조판서는 그간의 사정을 이지연에게 보고했다 이에 이지연은 대왕대비 앞에서 차제에 천주교를 뿌리채 뽑아야 한다고 극언했다. 어린 임금은 우의정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왕대비가 단독으로 이에 동의했다. 이번 처사에 있어서 대왕대비는 자기 오빠와도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김 대비의 결정은 모든 사람을 놀라게했다는 것이다. 병인박해에 순교한 복자 안(DAVELUY) 주교는 당시 교우들의 증언을 들어 이러한 비망기를 남겨놓았다. 『이 박해령이 가혹하기는 했으나 대왕대비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천주교인들에 대하여 적대적이 아니었으며 도리어 가끔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과연 우리 선교사들도 여러 번 그러한 체험을 했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기해년에 너무나 유력한 일파의 세력에 눌려서 마음대로 행동할수도 없었고 결국 그의 이름으로 선포된 무서운 박해령에 수결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안 주교가 말하는소위 유력한 일파란 다름아닌 풍양 조씨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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