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색을 빈틈없이 하여 교우들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대왕대비의 지엄한 하교가 있은지도 어언 보름이 지났다. 그러나 그간의 체포성적은 별로 좋지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잡혀온 교우들도 말하자면 모두가 송사리떼에 불과하였고 큰 고기는 아직 하나도 걸려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사헌부의 한 관리는 만일 천주교의 괴수를 잡지 못한다면 결국 천주교를 근절하지는 못할것이라는 요지의 상소문을 올리게 되었다. 말하기를『지금까지 체포된 수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원흉은 잡히지 않고있다. 그 책자를 번역한 것이라던가 또는 그 도구를 만든 것이 어찌 지각이 없고 비천한 무리들의 소행일수 있겠는가. 거기엔 반드시 약간의 재예가 있는 자가 있어서 비밀히 북경에 가서 구입해와서 여러 사람에게 전하여 전염시킨 것들이 틀림이 없다. 따라서 그 소굴을 찾아내서 소탕하지 않고서 지금 잡힌 사람들만 처형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써 천주교가 근절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상당수의 천주교 책자와 성물이 압수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압수된 성물중에는 불행하게도 범 주교의 주교관과 주교복장이 들어있었다. 실은 범 주교가 수원으로 내려갈 때 그것을 남 다미아노 회장에게 맡겨 놓았었는데 포졸들이 그 집을 갑자기 습격함으로써 발각되어 압수되었다. 이에 대왕대비는 형조판서 조승현과 우의정 이지연을 불러 그간의 경위를 캐물었다. 저번에 괴이한 물건까지라도 철저히 수색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여러 죄수들을 문초하였으나 별다른 단서는 찾아내지 못했다고 형조판서가 보고하자 김 대비는 현재 조사중인 아녀자 같은 무식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물을것이 없겠지만 약간 문자를 아는 자를 별도로 취조하면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압수한 책자는 어떻게 처리했는가고 물으니 아직 형조에 보관하여 두었으며 취조가 끝나는대로 불태워버리겠다고 대답하였다. 새나갈 염려는 없는지 단단히 봉하여 보관하고 있으므로 그런 염려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 우의정 이지연을 향하여 김 대비는, 『대신도 단단히 타일렀는가?』고 물었다. 대신의 대답은『가산을 수사할 적에 때로 소란을 일으키는 폐단이 있어서 이를 금지하였더니 그후부터는 체포되는 자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포교의 행동이 어찌 이러한가? 만일 먼저 가산을 수색하면 죄인 이후에 뉘우칠 경우에 다시 돌려주기가 어려울것이다. 각 부마다 각 동네의 책임자가 있을것이니 어찌 그 책임자에게 맡겼다가 기다려서 돌려주지 않는가』라는 대비의 지시에 이지연은 그렇게 각별히 타이르겠다고 하였다. 대왕대비와 우의정 사이의 이상의 대화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것처럼 그간 잡혀오는 교우들의 수가 많지않았던 주요 원인은 포졸들에게 가택의 수색을 금지시킨데 있었다. 아마도 증거물을 찾아낸다는 구실하에 가택의 수색과 가산의 약탈이 심히 성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잡힌 교우의 수는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형조 판서는 3월 20일(음 5월 3일)자로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자가 도합 43명인데 그 중에서 15명이 이미 배교했으므로 석방하였고 나머지 28명에게는 만단으로 깨우치고 있지만 종시 뉘우칠줄을 모른다고 보고하고 있다.
동월 28일자 보고에 의하면 28명 중에서도 11명이 배교했으므로 석방할 예정이고 다만 남명혁 권득인 박아지 3인만은 죽을지언정 배교할수 없다고 맹세하고 있으니 다시 한번 취조한 후에 그 처리방안을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다음날 29일에는 또 5명이 배교하여 석방할 예정인데 다만 이광헌 박희순 2명만은 한사코 배교하기를 거부하고 있으니 다시 취조하여 곧 그 처리를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교의 관과 복장은 포청으로 보내어 보관케 하는 한편 그밖의 성물과 서적은 모두 형조의 마당에서 불태워 버렸다. 또한 남명혁 권득인 박아지를 다시 취조하였으나 여전히 배교할줄을 모르니 결국 목을 자르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4월 4일자 보고도 마찬가지로 이광헌 박희순 2명을 다시 문초하였으나 끝내 회개할줄을 모르니 이 두 명도 목을 베는 길밖에 없다고 하였다.
드디어 4월 12일(음 5월 24일) 형조의 청에 의거하여 이소사 한아지 김업이 김아지 남명혁 권득인 박아지 이광헌 박희순 9명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또한 그들은 모두「불득시참」이란 판결문에 따라 당일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들 9명은 모두가 1925년 복자의 영광을 차지한 순교자들이다.
같은날 대구감옥에 갇혀 있던 박사의 이재행 김사건 등 3명과 전주감옥에 갇혀있던 김대권 이태권 이백언 신태보 정태봉 등 5명에게도 사형이 재가되었다. 이들은 이미 정해년(1827)박해때 잡힌 교우들이며 끝내 12년 간의 옥고끝에 숙원인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들의 이름이 기해년 복자대열에 들어 있지가 않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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