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가 중국에 전래될 당시 중국은 전성시대였다. 태종 고종 때 몽고 신강서장이 당의 영토였으며 중서 교통의 확장으로 요교 마니교 회교 경교 전교사들이 와서 전교를 하였다. 당나라시대의수도 장안은 그 야말로 국제도시 였다.
대진 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의하면 태종 정관(貞觀) 9년 635년 경교의 전교사 아라본이 와서 최초로 경교를 전했다고 되어있다. 아라본이 중국에 올 당시 년령은 대략 50세 전 후였다 하며 성품이 엄숙하면서도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이 있다 한다.
아라본 혼자 온 것이 아니고 수행원이 여러 명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휴대하고 온 것은 성경 530부였다. 그는 당시 순수한 전교사의 신분으로 왔다. 아라본이 장안에 들어올 때 태종은 총신 방현령을 보내어 서교(西郊)에서 영접해 드려왔다 하는데 이것은 특별 예우(禮遇)를 표시한다.
태종은 그 후에도 아라본을 수차 궁중으로 불러드려 강론을 듣고 경교를 듣고 경교를 참 종교라 하여 우대하였다고 한다.
아라본이 장안에 들어 온지 3년 후 정관(貞觀) 12년 638년 태종이 장안 의령방(義寶坊)에 십자가(十子街) 동북에 파사사(波寺斯)를 짖게 하고 전교사 21명을 두고 전교하게 하였다.
아라본은 중국에 온 후 7일에 한 번씩 주일을 지키고 미사를 드리고 고백성사를 주었다 한다. 아라본은 존수삭정(存鬚削頂) 즉 수염은 기르고 머리를 삭발 하였다고한다.
1625년경 중국의 섬서성의, 옛날에 화려하고 웅장했던 고도(古都) 서안(西安)에서 30리 떨어진 주질현에서 인부가 집을 건축하느라 땅을 발구 하던 중 석비(石碑)를 발견하고 기이하게 생각하고 석비를 세척한 결과 한문과 기기묘묘한 시리아문이 명각 되어 있었다. 경교비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시에 경교비를 구경하기 위하여 모여드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관부에서 알고 경교비의 손괴(損壞)를 막기 위하여 서안에서 1리쯤 떨어진 금승사(金勝寺)에 옮겼다. 이것은 동양의 최고로 오래된 기독교 비이다.
높이가 9척 넓이가 3척 반 두께가 1척이며 한문 1700자와 시리아문으로 되어있다. 글씨는 혜서체(楷書體)로 되어있는데 명필이며 비문의 문체도 문학적 가치가 있다.
진한(秦漢)이래 석비(石碑)건립이 대유행이었으므로 경교에서도 이 영향을 받아 비(碑)를 세우게 된듯하다. 전면 상면에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3자씩 3행으로 종(縱)으로 명각 되어있다. 이 비는 도교와 불교적인 색채를 많이 띄고 있다.
반용(蟠龍) 이 큰 여의주를 안고 있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일본의 좌백호랑(佐伯好郞) 교수는 이 여의주는 곧 가장 고귀한 복음(福音)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십자가 밑에 연꽃과 구름이 조각되어 있는데 연꽃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구름은 도교를 상징한다.
경교비는 덕종 건중(建中) 2년 781년 경정(景淨)이 비문을 짓고 여수암(呂秀岩)이 글씨를 썼다. 삭방절도부사(朔方節道副使)이며 주교인 이사(伊斯)가 자금을 후원하여 주었다. 이사 주교는 숙종과 덕종 때 경교의 주석(桂石)이었다. 경교비는 무종의 경고 박해 때 당에 묻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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