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의 자리에서 플라톤은 그의 친구로부터 죄생의 대작인「대화편」을 한마디로 요약해 달라고 하는 청을 받았다.
깊은 몽상에서 깨어난 플라톤은 친구를 바라보며「임종연습」이라고 대답하였다. 플라톤의 이 한마디 말은 죽음이 인간을 완성시키는 최후인자임을 잘 대변해 준다.
정욕의 번뇌로부터 이탈하는 의지의 단련을 추구하였던 세네카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은 항상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적 발언을 하였다. 그는 인생을 잔치에 비유한 자였다. 잔치서 지정된 시간에 우아하게 물러나는 것이 손님된 사람의 의무이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세상에 내보낸 우리의 주인에게도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공포를 죽음 의식의 탈피에서가 아니라, 죽음 의식에의 친근감에서 잊으려 하였다. 또 그는 어린이로부터 노년까지의 전 생애는 또 다른 탄생을 위한 성장이라고 생각하였으며『종말이라 생각하여 네가 두려워 한 그날은 바로 영원 속에서의 탄생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세네카를 중심으로 한 스토아 학파들의 이러한 죽음관은 그 뒤 기독교 사상에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띠누스는 원죄설과 성삼위일체론으로 제2위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리를 체계화함으로써 죽음의 공포에 해답의 열쇠를 주었다. 그는『죽음의 공포가 항상 내 마음 안에 있었으며 죽음의 공포는 하느님의 성총을 통하지 않고서는 극복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착하게 사는 일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일에 결부시켜 말한 사람도 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는『마치 하루를 행복하게 잘 보내면 행복한 잠을 잘 수 있듯이 인생을 잘 보내면 행복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과연 인간은 신의 은총으로써만 가능한 깊은 신앙심이 없이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아직『인간은 하느님을 행복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 안주하기까지는 항상 외롭고 근심스럽다』라고 고백한 성아우구스띠노의 말씀보다 더 위로가 되는 해답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신앙의 은총 밖에서 죽음의 공포는 결코 극복될 수 없으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건영의「차가운 강」이라는 소설을 읽으면 뇌종양으로 인하여 6개월 후에는 죽는다는 아름다운 여대생 김양을 알게 된다. 그녀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저는 그 여섯 달을 후회없이 보낼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울 작정이에요. 저는 그 여섯 달의 시간을 충분히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저 자신을 비관하거나 죽음이 무서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이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거부와 분노와 절망의 감정없이 유순히 수락할 뿐만 아니라, 김양은 거기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에 자신을 조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그녀는 의사에게 이렇게 당부한다.『저는 진통제나 수술 같은 것에 의뢰하지 않고 그냥 견뎌 보겠어요.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보겠어요. 천주님께서 내리시는 시련으로 받아들이겠어요.』 이러한 경우 이처럼 아름다운 김양의 죽음이 김양 자신의 구원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그리고 김양이 이처럼 큰 고통을 유순히 감내한 그 성스러운 죽음 이후에 또 다시 연옥이라는 속죄의 시공을 거쳐야만 천주를 뵙게 되는 것인가?
나는 여기서 또 내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12월 8일 오후 여섯 시에 모두들 모여 함께 기도하자』고 한 달 전부터 말씀하시던 어머니께서 정작 그날 여섯 시에『마리아!』하고는 임종하시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장례식에는 빈부귀천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앉아「참으로 거룩하셨던 어른」이라고 칭송했었다고도 사람들은 말한다. 천리 타국에서 돌아와 가슴이 무너지는 이 소식에 접한 나는 나의 어머니께서 버스한 정거장 떨어진 저쪽 마을로 이사 가신 것이라고 나를 인식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연옥이라는 곳과 나의 어머니를 연결시켜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안토니 빌헬름의 저서「우리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즐겨 읽는다. 그는 말한다.『임종 시의 고통은 예수의 죽음을 묵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기쁨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임종 시의 고통은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연옥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 고통은 곧 하느님과 함께 천국의 기쁨을 맞는 징표가 된다.』
이 말은 나에게 깊은 위로를 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기도한다.『지옥에 가리만큼 죄 많은 사람의 영혼은 김양이나 나의 어머니 같은 분의 공로를 나눠 받아 영벌을 면케 되옵고, 김양이나 나의 어머니 같은 분들은 지금 영복 속에 있으리라 믿습니다. 전 생애를 걸고 임종 연습에만 헌신한 착한 사람들의 영혼은 연옥을 뛰어넘는 완성된 죽음을, 죽는다고 제가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