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은 집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껄끄럽고 졸리운 듯한 목소리에 불쾌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헤이, 참새가 웬일이신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 형화가 전화를 걸어주는 일이 다 생기다니.
-물어볼 일이 생겼어요. 자세히 대답해 주셔야 돼요.
-무슨 일인데 그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는 거지?
-아침에 한강에서 실어 날랐다는 사람 있잖아요…
-그게 참새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분 병원으로 태우고 가셨다고 했지요?
-그래 시체 안치실로 모셨다.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어요?
-참새, 좀 이상하군.
-어떻게 됐느냐니까요.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좀 수상쩍어 가르쳐 주기가 싫어지는데.
-처음으로 부탁드리는 거예요. 대답해 주세요.
-천상 오늘 밤에 다시 만나야겠군.
내가 나가지, 그렇지 않아도 잠이 덜 깨었는데 잘 되었어.
-전화로도 충분해요.
형화는 발끈 화를 내었다. 그리고 화가 난 채로 수화기를 들고 얼마간 서 있었더니 또또또 하는 소리가 나고는 그만 전화가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공중전화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 했던 것이다.
경민에게 다시 전화를 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형화에게는 이 고통보다도 김 교수의 죽음이 더욱 절실했으므로 기를 꺾이고 말았다.
경민은 잠결에 머리를 빗지도 않은 채 차를 몰고 형화가 서 있는 공중전화통 근처까지 달려왔다.
그는 형화를 발견하더니 여유있게 차를 형화 곁으로 갖다대고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물었다.
라이터불이 그의 안경의 금테에서 환하게 반사되었다가 곧 사라져버렸다.
형화는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 녀석 어떤 놈팽인데 참새를 안달하게 만드는 거야?
경민은 시비를 걸듯이 물었다.
형화는 막상 무어라 대답할 수도 없고 어떻게 말을 꺼낼 수도 없어서 경민이 운전해 가는 밤거리만을 쳐다보며 말없이 한동안을 지냈다. 경민은 계획도 없이 이 거리 저 거리를 달렸다.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원도우를 통해 연거푸 스쳐 지났다.
문득 형화는 경민의 말을 기억했다.
-이 세상 천지가 모두 누이의 무덤이라구.
그는 산소도 없이 화장해버린 누이의 무덤이 이 세상 천지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저렇게 비쳐오는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서 있는 저 거리가 무덤이란 말인가.
이상한 냄새가 차 안에서 풍겨왔다.
형화는 코를 킁킁거리며 차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들의 대화는 풀리기 시작했다.
-무슨 냄새라도 맡았어?
-예 안 좋은 냄새군요. 부잣집 아들이 세차할 돈도 없어요?
-후후, 나는 이 냄새가 향수 냄새보다도 더 좋은 걸.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새예요?
경민은 급히 차를 세우더니 차 내 (車內) 의 등을 켰다. 뒷자석의 하얀 시트에는 엄청나게 핏자욱이 뭉개져 있었다.
형화는 입을 막으면서 아악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때?
-…
-내가 뭐 참새 네가 보구 싶어 이 밤중에 나온 줄 아니? 저걸 보여주려는 거야. K대학 김학중 교수라는 소릴 듣고 네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 너한테서 전화가 왔길래 분명 무슨 인연이 있겠다 싶었지.
형화는 크게 박동하는 가슴을 견디지 못한 끝에 기어코 흐흑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명 저렇게 뭉개진 핏덩이 자국은 김 교수의 마지막 생명의 흔적일 것이리라.
형화는 벌써 검게 변색되어가는 핏자욱을 보면서 울음을 더해갔다.
그리고 저걸 세탁하면 그 자욱마저도 영영 없어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서러웠다.
-우선 병원에 닿자 그의 신원을 확인하기 시작했지. 안주머니에서 수첩과 주민등록증이 발견되었어. 급히 자택으로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그 전화번호 바로 밑에 무어라 적힌 것이 눈에 띄는 것이야. 그래서 무언가 읽어 보았지. 본인이 만약 생명을 잃을 경우는 내 집 책상 서랍 오른쪽 칸의 맨 밑바닥의 종이를 뜯어보시오 라고 적혀 있는 거야. 전화를 걸었을 때는 사모님과 누군가 자지러지게 웃던 소리를 미처 그치지 못한 채 쿡쿡 웃고 있었어.
-서랍에서는 그래 무엇이 발견되었나요?
형화는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사모님께 말씀을 전하고 서랍 이야기를 했지. 그리고 집의 주소와 약도를 물어 나도 모르게 차를 몰고 찾아갔어. 사모님은 의자에 앉아 무릎에는 그 유서 종이를 내려놓은 채 넋을 잃고 망연히 앉아 있더군.
-유서에는…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어. 깨어있는 것이 곧 살아있는 것이다. 즉, 죽는 것은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태어남을 당했다는 원초적인 숙명에 충실하는 것인 만큼 죽는 것도 그저 죽어지는 숙명에 충실하는 것이다. 나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동안 만나서 서로의 태어나 있음을 확인시켜 준 많은 생명들에 감사한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자연과 합일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는 화장되어질 것을 부탁한다. 그것이 내가 가장 빨리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될 수 있는 한 부패되지 않은 채 화장되길 바란다. 형화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를 한참 동안 궁리해야 했으나 그 의미를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사모님을 이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달렸지. 그분이 이 시트 위의 핏자욱을 보고는 어땠으리라고 짐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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