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다 알면서 아무도 그것을 말하거나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장농 속 깊숙히 아니면 골방이나 창고 속에 감추어 두고 생각하지 않고자 노력한다. 꼭 한 번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건만 죽기가 싫고 두렵기 때문에 죽음의 현실을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정식적 미숙을 의미한다.
생명은 모든 가치 체계의 중심 긍정이고 죽음은 그것에 대응하는 궁극적 부정이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지양되어야만 할 시점에 우리의 정신문화는 도래하였다.
최근에 이르러 나는 항상 죽음을 그 은신처에서 끄집어내어 대면하자는 의도에서만 글을 써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 글이 병적이거나 우울하다거나 의기저상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해야 하겠다. 죽음의 인식이 어떻게 나의 인생을 보다 가치있게 할 수 있는가를 항상 모색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한 순간마다 죽음에 대한 주제적 인식이 대담을 요구하고 따라서 인생에 보다 큰 의미를 가져올 수 있을 때 그 개별적 인간의 생활에는 기쁨과 향상과 소망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으로 생을 살아가는 목적의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 인생과 죽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가 확신하기 때문에 나는 문학을 사랑하며 글을 쓴다. 내 인생과 죽음에 도움이 될 것이 아니라면 나는 명예나 황금을 물고 오는 일이라도 거절하고자 노력한다. 이제 나는 생과 사를 바로 보고 바로 이해하여 죽음현상에 대한 전면적 총체적 지식과 지혜를 가짐으로써 살아남은 날들을 평화스럽게 보내고 싶다.
80을 산다고 해도 이제 반생을 넘어 살았다. 늙는다는 것은 죽음의 부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노년을 준비함은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늙는다는 것은 인생의 축적된 가치 때문에 참으로 숭고한 것이며 병든다는 것은 인생에 대한 회고를 가능케 한다는 가치 때문에 또한 아름다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생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완성시키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할 줄 안다. 이와 같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생의 의미를 확신하고 위엄을 지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 인간은 인간과 신, 순간과 영원, 개인과 우주, 부분과 전체 사이에서 갈등하는 완전지향성의 존재이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아니면 적어도 젊어서부터 생과 사에 관련된 자기 철학을 확립하여야 한다. 그러한 사람은 죽음이 예견되는 노후에 이를수록 만족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래서 노인에게야말로 철학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철학이라는 말은 신앙이라는 말로 대치하여 생각해도 된다. 이 철학이 없는 노인은 인생을 저주하고 젊은이에게 심통을 부리고 망녕을 떤다. 그러나 노년기는 철학을 배우기엔 늦은 나이이다. 미리 배우면서 늙어 왔어야 한다.
변화야말로 위대한 것이다. 죽음도 또한 생명현상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참으로 위대한 실상이라 하겠다. 삶을 모르면 죽음도 모르는 것이고 죽음을 모르면 삶도 모르는 것이 바른 이치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하나의 대상이 갖고 있는 양면성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어서 죽음의 신비를 깨달을 때에 비로소 삶의 가치가 명료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죽기 위하여 산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삶이 삶이기 위하여 즉 인생을 존재케 하기 위하여 죽음이 불가결한 실상인 한「인생을 완성시키는 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과 왜 죽음에 대한 담화를 회피하여야 하느냐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엘리자베스·퀴블러·로쓰라는 여의사는「죽음과 임종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임종의 단계를, 죽음에 대한 충격 부정 분노 절망 타협 수긍 그리고 죽음의 7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그의 죽음을 인식시키고 그가 그의 죽음을 완성된 인생의 가치 위에 승화시키도록 준비시킬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람이 비록 죽기가 싫어서 처음에는 죽을병에 걸려 있음을 알고 충격을 겪는다 하여도 이를 부정하고 분노하며 이에 절망하는 동안 반드시 타협을 거쳐 죽음의 필수성을 수긍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수백 명 환자들의 실제 경험을 통해 퀴불러 로쓰는 논증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그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여러분은 살고 나는 죽습니다. 그러나 누가 더 행복할 것이냐에 대하여는 하느님 이외에 아무도 모릅니다』죽음은 불가사의의 영역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적어도 죽음의 해답을 아는 철학자들이다.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그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반드시 밝혀주고 평화롭게 죽음을 수긍하고 완성된 죽음을 준비하도록 도우는 것이 살아남은 우리 신앙인들의 의무라는 것을 나는 거듭거듭 다짐해 두고 싶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