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았다! 난 살았다!』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어린애처럼 두 손을 쳐들었다. 그동안의 모든 거북했던 마음들이 거짓말처럼 확 풀어졌다. 밖에는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토마스씨 생각나지 않으세요. 눈장난 말예요.』
체칠리아가 창밖의 눈을 가리켰다.
가장 적절한 대답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지도 몰랐다.
나는 이렇게 소리쳤다.
『좋습니다. 나가서 한바탕 눈장난을 벌립시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나는 명랑해졌다.
우리들은 성당마당으로 달려갔다. 성당에는 이미 수십명의 학생들이 뛰놀고 있었다. 눈사람은 다섯개도 더 만들어져 있었다. 모두가 교우들이었다. 겨울방학 동안에 만난 함박눈 여기저기서 눈의 축제를 외쳤다. 눈은 금방금방 머리위에 수북해졌다. 누가 모시러갔던 모양이다. 신부님이 나오셨다. 사제관의 루비도 껑충거리고 나왔다.
신부님은 나의 출현을 보시자 어이 토마스! 하고 한 손을 번쩍들었다. 나도 신부님! 하고 두 손을 번쩍들었다. 눈장난을 하기엔 풍족한 인원이었다. 신부님이 편을 갈랐다. 체칠리아는 적군편이 되었다. 나는 약간 여위긴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호르륵!』
시작의 호루라기가 울렸다. 모두들 우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나도 질렀다. 눈덩이가 핑핑 나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무질서하게 흩어져 쫓고 쫓겼다. 나는 아무에게나 눈덩이를 던졌다.
기뻤다. 신이 났다.
눈덮힌 종각사이로 새들이 날고있다.
새들은 한결같이 지저겼다.
수녀님이 신부님의 눈덩이에 맞았다.
이번엔 신부님이 눈덩이에 맞는다.
눈덩이에 맞고도 깔깔 웃는다.
나의 등에 퍽하고 눈덩이가 날라왔다.
돌아보니 체칠리아가 웃으면서 저만큼 달아나고 있었다.
나는 뒤쫓았다.
체칠리아는 성당 뒤로 달린다.
나도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
성당 뒤엔 창고가 있었다.
창고의 들른 미닫이 엿보니 조금 열려있었다.
체칠리아가 그사이로 뛰어들었다.
나도 뛰어들었다.
금새 뛰어든 체칠리아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얼른 출입문을 닫았다. 환기창에서 새어든 빛이 겨우 창고안을 밝혀주 고있었다.
나는 살그머니 발소리를 죽였다. 창고안은 꽤 넓었다. 구빈자를 위해서 잔뜩 쌓았던 포대들이 지금은 하나도 없다.
리어카 식으로 만든 장의차가 한쪽 구석에 세워져있다. 성당의 못쓰게 된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져있다. 체칠리아가 숨을만한 곳.
나는 낡은 제대뒤로 걸어들어갔다. 먼지가 푸석 일어났다.
탁구대 밑을 들여가봤다. 없다. 드럼통쪽으로 들어갔을까?
드럼통이 서너개 포개져있는 가까이로 걸어갔다. 뚜껑을 죄다 열어봤다. 낡아빠진 성구들이 들어있을 뿐이다.
어디 숨었을까.
창고안의 어둑한 빛이 야릇한 기분을 자아내게 한다.
출입구문 외에도 출구가 있을까. 출구는 한곳뿐인것 같았다.
손에 쥔 눈덩이가 시렸다. 나는 그걸 떨어뜨렸다. 옷자락에 손을 닦으며 마지막 한군데를 향해갔다.
장의차.
설마하고 나는 생각되었다. 장의차는 검은 휘장으로 둘러 씌워져 있었으며 보기만해도 섬찍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휘장을 걷어올렸다.
『체칠리아!』
그녀는 그속에 웅크리고 앉았다.
자기를 찾아내길 무척이나 기다렸다는듯『토마스씨』하고 미소를 띄웠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다고 알아차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 같은 사내는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체칠리아였다.
나는 얼떨떨해졌다.
계명중의 하나가 하필 이럴 때 떠오르는 것이었다.
간음을 행치말라.
『토마스씨 제가 맘에 들지 않으세요?』
그녀는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할 수 없이 좋아합니다』
『그러시다면 무얼 망설이세요?』
나는 육계명을 들먹일 수는 없었다.
『하느님께서 지켜보시니까요』
체칠리아의 표정이 싹 변했다.
그녀는 웅크린 자세를 풀고나왔다. 그리고는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이제 토마스씨를 잊겠어요』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총총히 창고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망치같은 것에 얻어맞은 듯이 멍청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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