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헌(아오스딩) 남명혁(다미아노)을 위시하여 9명의 남녀교우가 4월 12일(5ㆍ24) 서울 서소문밖의 형장에서 목을 잘리어 순교했다고 하였다. 기해년에 들어서서 물론 그간 옥사한 교우들은 이미 있었지만 공식으로 사형이 집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이들 아홉분이 모두 복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광헌의 전기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이광헌은 비단 자기자신 뿐만아니라 그의 동생 그리고 그의 부인과 딸 이렇게 4명의 복자를 배출시킴으로써 복자를 제일 많이 가진 가장 영광스러운 집안이 되었다.
이광헌은 경기도 광주 이씨 가문 양반의 후예로서「치운」이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이것이 아명인지 또는 자인지는 알 수가 없다. 본시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으나 절제함이 부족하여 젊어서 심히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가 30세쯤 되었을 때 그의 부인과 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아오스딩이란 본명을 얻었다. 입교한 후로는 이전의 탈선행위를 깊이 뉘우치고 행여나 일서일행에 실수가 있을까 삼가고 신중하여 그의 거동이 무겁고 질서가 있었다. 그의 이와 같은 진실한 회개와 극기행위는 참으로 모든 이가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여러번 군난을 피해야 했으므로 미구에 가산을 탕진하였다. 그러나 빈곤을 참아 받으며 처자와 더불어 열심히 수계하였고 10여년동안 이 가난으로 인하여 조금도 불평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 아오스딩은 이렇듯 가난하여 거처할 집조차 없었으므로 교우들이 추렴하여 서소문밖「고마창골」이라는 곳에 기와집 한 채를 사주어 살게하는 한편 공소집으로 쓰게하였다. 그가 회장으로 임명된 것이 이무렵의 일일것이다.
공소때가 되면 자기집에 교우들의 모임을 준비하여 성사를 받게하였으며 평상시에도 많은 교우들를 모아 주일과 파공을 지키고 성경해석도 듣게하였다.
이 회장은 냉담자를 회두시키고 외교인을 권면하며 병자를 위로하는 일을 마치 자기의 소임처럼 생각하고 동분서주하니 회두하는 자가 많았다. 교우들을 만나면 늘 천주님을 위하여 이 세상의 고통을 참아 받으라고 권하였고 자신도 가난에서 오는 가혹함을 참아 이겨냈으며 비록 자주 먹을것조차 없을때일지라도 조금도 견디어내기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부인 권 발바라 동생 이 요안 딸 아가다도 다 그들 집안의 숙명적인 가난을 기쁨과 인내로 받아들였다. 당시의 모든 교우들이 한결같이 이 가족 4명을 칭찬하고 그들의 착한표양과 성덕을 증거해 마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해년 2월 25일(4ㆍ8)은「사백주일」다음 화요일이었다. 밤도 깊어서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때 갑자기 포졸들이 이 아오스딩의 집을 습격하여 일가족 모두를 체포하였다. 동시에 가산도 완전히 몰수당했다.
그들을 우선 포청에 가두고 무거운 형벌로 천주를 배반하라고 위협하였으나 종시 굴복하지 않으므로 형서로 보냈다.
이때 포청에서는 이 아오스딩의 여덟살짜리 어린아들과 80세의 노모만은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이들도 가족과 이별하기를 거절하자 부득이 그들도 함께 형조로 이송하였다.
형서의 형관이 17세와 12세의 어린 남매를 우선 좋은 말로 달랬다. 소용이 없자 혹독한 형벌을 가해 보았으나 이건 사람이 아니요 괴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의연히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는동안 3월 5일(4ㆍ18)에 정식 박해령이 선포되니 국법이 어린이들을 참수하는 법이 없으므로 이것을 구실삼아 우선 어린이들을 포청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이 아가다 남매는 한사코 부모와 생사를 같이 하도록 눈물로써 호소했으나 국법이라 순종할수밖에 없었다. 포청에서 이 어린것들은 기아와 갈증 뿐아니라 거듭 고문을 겪어야 했으나 천주님의 은총에 지탱되어서 끝내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부모가 배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거짓말도 해보았으나 그들은『부모가 배반을 했건 안했건 그것은 그들의 일이고 우리는 우리가 늘 섬겨온 천주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고 용감히 그들의 신앙을 고백했다.
형조 판서의 교우들에 대한 호의를 알고있던 이 아오스딩은 그의 두 아들과 특히 포청에서 홀로 위험에 처해 있을 딸을 석방해 주기를 형판에게 청했다. 『좋다. 애들뿐만 아니라 네 부인도 석방해 주겠다. 그러나 조건은 네가 배교하는 것이다』『그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고 이 아오스딩은 형관의 제안을 일축했다.
그래도 형관은『한마디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너뿐만 아니라 부인과 동생과 자녀를 다 놓아주겠다. 또 네 가산도 다 돌려주겠다』고 달래보았다. 그러나 아오스닝은『천주는 만만코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다. 형관이 대노하여『네 몸은 고사하고 처자를 모르는 놈이니 죽도록 때리라』고 하였다. 살점이 떨어지고 유혈이 낭자하여 그의 얼굴과 옷이 피에 젖으니 구경하던 사람이 다 놀라 차마 바로 보지 못했다고 한다.
형장에 이르러 이 아오스딩은 네번째 칼에 비로소 참수치명하니 그때 나이 53세였다. 일찌기 남 다미아노는 이 회장을 보고『나는 약하니까 내 목을 베는 것은 쉽겠지만 자네 목은 그렇게 굵고 튼튼하니까 자네 목을 맡은 휘광이는 고생하겠네』하였다고 한다. 과연 이 예언은 적중하였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