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라고도 불리던 남명혁은 문벌이 아주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서울 서소문 근처 문안에서 살고 있었다.
중년에 이르러 비로소 입교하였는데 방탕하게 지냈었다. 중국인 유 신부가 입국하자 그로부터 영세하고 더욱 열심해졌다. 외인시절의 친구들이 많았으나 이래 그들과의 상종을 끊고 전심으로 교리를 배워 익히고 집안사람을 가르치며 냉담자를 권면하고 외교인을 권유하여 많은 사람을 회두시켰다. 뿐만아니라 죽어가는 유아를 찾아 대세를 붙이고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래서 모든 이가 이구동성으로 그의 덕행과 열성을 찬양하며 그의 착한표양을 본받으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무엇보다도 교우들이 성사를 받게끔 그들을 자주 자기집에 모이게 했으며 그가 결국 잡히게 된 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소를 중단하고 수원 갓등이에서 급히 상경한 범(Imbert) 주교는 때마침 부활첨례도 임박해서 성사집행을 강행군 시켰지만 그래도 서울 교우에게 다 성사를 주지는 못했다.
아직도 두 공소가 남아있었는데 따로 공소집이 없어서 남 회장이 자진하여 자기 집에서 공소를 치르게 하였다. 부활이 지난 금ㆍ토 이틀간을 공소날로 정하고 범 주교는 하루에 30명 이상 받는 것은 금지했다.
하지만 하루에 백명씩 모이자 주교는 몹시 성이 났고 남 회장도 화가 치밀었지만 참았다.
여하간 범 주교는 주일 새벽날이 새기전에 남 회장집을 나와 주교댁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바로 이날 저녁 포졸들이 급작히 남 회장 집으로 들어 닥쳐서 집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붙잡았다. 이날은 2월 24일(4ㆍ7)사백 주일 밤도 상당히 깊었었다.
범 주교는 남 다미아노에게 주교의 제의를 안전한 곳에 감추어 두라고 신신당부하였으나 며칠동안 많은 교우를 치다꺼리하느라 너무 지쳐서 미처 그것을 치우지 못했었고 게다가 포졸들이 달려들었을때는 이미 모두가 잠이 깊이 들었을 때였다.
남 회장의 형수는 여덟살 먹은 아들과 침모를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나가 이광헌 회장집으로 피신했으나 뒤쫓아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남과 이 두 회장의 식구가 모두 붙잡혔고 범 주교의 제의 경본 주교관도 포교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같은 신기한 물건을 생전 처음 본 포졸들은 정신이 황홀하여져서 은실로 짜고 수놓고 한 주교관을 이 세상에 다시 없는 신기한 물건으로 여겨 그 값을 일금 5백냥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남 다미아노는 그의 부인 이 마리아가 학대하고 업신여기는 포졸들을 향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는 것을 보자 부인에게 큰소리로『교우는 주를 위하여 어린양처럼 죽어야한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타일렀더니 부인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그 후로는 형벌과 욕을 많이 받아도 조금도 어려워하는 마음없이 이겨내게 되었고 드디어 남편을 따라 용감히 순교하여 복녀의 영광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날이 밝자 포장이 다미아노를 불러 문초하기를『이 관과 제의는 누구의 것이며 어디서 났느냐? 바로 아뢰라』고 위협하였다. 다미아노는 그 물건이 신유년(1801)에 순교한 주 신부의 소유였다고 주장하였을 뿐더러 자기 자신이 이런 차림을 하고 범가죽 위에 앉아있었다고까지 말하였다. 포장은 이 말을 믿는체 하였다. 그가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서였다. 사실 조정에서는 서양선교사 3명이 조선에 들어와 있다는 풍문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이 물건이 그들의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사실이 법정에서 공공연하게 증명이 되는날엔 양인들을 체포해야 할것이오 그렇게 되면 사건이 더욱 복잡 미묘하게 될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한것이다. 그러나 박해령이 선포되니 3일후 판관은 교우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하여 대표로 다미아노를 택해서 그에게 무서운 형벌을 가했다.『너는 네 집에서 압수된 사건과 사복(주교관과 주교복장)에 대해 거짓 공초를 했다.
『어떻게 벌써 40년전에 죽은 주 신부의 물건이었다고 할 수가 있단말이냐』다른 교우들이 보는데서 다미아노의 팔과 다리 옆구리뿐 아니라 온몸을 사정없이 매질하였다. 다미아노는 까무러쳐서 4일간이나 생사간에서 헤메던 끝에 겨우 소생하였다.
순교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고 다미아노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어『이 세상은 나그네를 위한 여관이고 우리의 본고향은 천국이니 주를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히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하였다. 서소문밖 형장으로 떠나면서 참수되는 순간까지 기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의 나이 38세였고 때는 기해년 4월 12일 금요일이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다미아노에게 『후세에서 그대를 어떻게 불러주기를 원하는가』고 물었더니 『성의회원 치명자 남 다미아노라고 불러주는 것이 나의 소원이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소원이 이렇게 채워질줄이야 누가 짐작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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