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성도」라고도 불렸는데 그의 정식 이름이「득인」인 것으로 보아「성도」는 그의 자인듯 하다. 원래 서울 문안 태생이다. 일찍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이어 그가 열여섯살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어머니가 열심한 교우였던 관계로 권 베드로도 일찍부터 어머니의 좋은 표양을 따라 열심히 봉교하였다. 어머니를 여의고나서 얼마 안되어 결혼하였고 그 후 약장수를 하는 형 방지거의 집에서 한때 같이 지냈다. 그 후「사직골」에 거처하면서 조그마한 장사를 하여 겨우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갔다. 「너리골」로 이사온 후로부터는 고상과 패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삼았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가 사형선고를 받게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판결문에「그가 여러해 동안 사학을 강습하여 자수로 사구를 만들어 널리 흉도에게 전파하였으니 의법 처단하겠습니다」고 그의 죄목이 명백히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30세가 되어서 그의 열심은 배가했다. 일례로 베드로는 닭이 울면 곧 일어나 촛불을 켜고 날이 밝기까지 신공에 잠겼다고 한다. 또한 남의 일을 돌보는데 진심 갈력하였고 이로 인하여 오는 어려움에 개의치 않고 마치 그것이 자기의 소임인양 생각했으므로 모두가 그의 주밀하고 성실한 봉사에 탄복하여 마지 않았다고들 한다.
권 베드로와 그의 가족이 잡힌 것은 무술년(1838) 12월 2일 저녁이었다. 양력으로는 기해년 1월 16일에 해당되므로 말하자면 기해박해에서는 제일 먼저 잡힌 가족이다. 그러므로 그의 체포로 인하여 받은 교회의 놀라움과 충격은 대단히 컸었다. 이 슬픈 소식은 곧 수원 갓등이를 방문 중이던 범 주교에게 전해졌다. 범 주교는 인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중단하고 급거 귀경했다.
마침 대목도 가깝고 보니 이 평온한 시기를 이용하여 서울의 1천명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는 한편 두려워하고 있는 교우들을 격려하고 안심시킬 의도에서였다.
권 베드로가 잡힌 경위는 이러하다. 12월 2일 저녁 베드로는 자기를 찾아온 처남과 안심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돌연 대문을 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쪽으로 나가려는 부인에게 베드로는 『이 소리는 이상해 내가 나가겠다』고 말하였다. 대문을 열자 횃불을 든 포졸들이 뜰 안으로 들이닥쳐 베드로에게 수갑을 채워 앉히고나서 방으로 들어가서 베드로의 부인과 처남을 향하여 너희도 천주학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묵주를 끄내 보이면서 과연 천주교를 믿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포졸들은 그들로 잡아 베드로와 함께 포청으로 압송하였다. 어린애들을 합쳐서 모두 5명이었다.
베드로는 옥중생활 5개월동안 가끔 부인과 처남에게 편지로써 같이 순교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베드로는 기회만 있으면 편지를 보내어 그들이 육정을 끊고 회개하여 자기와 같이 순교하도록 권고했다. 베드로의 자부 이 아가다는 시복 수속을 위한 증언석상에서『나는 내 눈으로 이 편지를 보았습니다.
내 시어머니는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때 배교로 치명의 은혜를 잃게된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었습니다』고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을 회고하며 증언하였다.
포청 문초에서 포장이『왜 천주학을 하느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대답하기를『천주는 신인과 만물의 대주이십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며 만물을 사용함으로써 천주로부터 허다한 은혜를 입고있으니 그 은혜가 무한한지라 어찌 보답하기를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은 마땅히 천주를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고 하였다. 포장이 크게 노하여 혹독한 형벌을 가하며『네 형과 주교신부가 있는 곳을 대라』고 위협하고 재촉했다. 하지만 베드로는 끝내 한사람도 고발하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후에도 4개월동안 기아와 추위의 무서움을 겪었다. 뿐더러 다른 옥수들로부터도 온갖 유의 모욕과 곤욕을 받았다. 이렇게 베드로를 강박하여 꼭 그를 배교시킬 작정이었으나 도리어 이러한 고문중에서 베드로의 의지는 더욱 굳어지고 그의 열성은 더해갈 뿐이었다.
기해년 4월 12일 베드로를 수레에 태워 서소문 밖으로 끌고나갔다. 수레가「경매골」의 한 교우집 앞을 지날때 베드로는 그쪽을 바라보며 침착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혼자말로『이 집의 교우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고 말하는듯 했다. 사실 그때 많은 교우가 이 집에 모여서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동료 8명과 더불어 그의 순교를 완성하니 때에 그의 나이 35세였고 치명후에도 그의 용모는 웃는 모양이었다.
증인 김 방지거는 그때 나 신부가 권 베드로에 대하여 한 말을 이렇게 전하였다. 『마침 나신부가 내 집에서 성사를 주고있을때 권 베드로가 체포되어 치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 신부는 베드로가 그의 목을 도끼밑에 용감히 넣었다는 소식을 듣고 웃으며『전엔 베드로가 내 앞에 꿇어서 인사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내가 베드로 앞에 꿇어서 인사해야 할 차례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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