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의 방에 들어서자 향수냄새를 맡았다. 향수냄새엔 그녀의 체취도 배여있었다.
나는 동작이라든가 감정을 스스로 제한했다. 조심스러워서였다.
그녀는 옷장문을 열었다. 옷장안엔 그녀의 옷들이 수십가지가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죄다 양장점에서 맞춘 비싼 옷들이었다.
나는 속으로 원피스 투피스하고 뇌까렸다.
『토마스씨, 여길 좀 고쳐주세요』
그녀는 옷걸이 사이에있는 서랍을 가리켰다. 부서진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나는 별 흥미없다는듯 말했다.
『한번 열어보세요. 잘 열리지를 않아서요』
나는 손을 뻗혀 서랍을 당겼다.
쉽게 열렸다.
『어머나 아까는 안열렸는데』
그녀는 이상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랍안에는 돈뭉치가 들어있었다. 오백원권이 다섯 뭉치는 되어보였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곧 눈치챘다. 돈자랑을 하기위해서 일부러 그러는구나 하고. 그녀는 서랍을 도로 닫아달라고 말하며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서랍을 닫아주고
『이젠 나가도 좋겠죠?』하고 물었다. 그녀의 집안식구 중에 누구든 들어닥칠것만 같아서 잔뜩 불안한 마음이었다.
『한가지만 더 부탁하겠어요』
그녀는 또 무얼시킬지 몰랐다. 나는 저번에 그녀의 소리치던 말이 얼핏 생각났다. 우리집에 고용된 이상 주인의 시키는대로 해주는게 원칙 아녀요.
『네 해드리겠어요』
그녀는 다시 생기를 띠면서
『전화를 좀 걸어주세요』하고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나는 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담 싶었다. 그러나 꾹 참고 수화기를 들었다. 소동식 전화였으므로 교환에게 번호를 알리니 곧 연결되었다.
『연결되었습니다』나는 수화기를 내밀었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김 계장님 계신지 좀 알아봐주세요』한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신이 바로박힌 계집앤가 해서였다. 그녀는 입술을 앞으로 조금 내민다. 나는 전번과 같은 말을 또 하려나 싶어서 얼른 수화기에 입을 가져갔다.
『여보세요. 김 계장님 계세요?』
저쪽 목소리가 분명찮게 들렸다. 나는 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여기 가구점입니다. 김 계장님 계세요?』
언성을 높혔다. 여전히 저쪽 목소리가 분명찮다. 수화기를 귀에 댄 나의 뺨에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녀의 뺨이 달라붙었다. 나는 그녀가 수화기의 소리를 듣기위해서 그런줄 알고 가만있었다. 그리고 살며시 옆눈질을 해봤다. 그녀는 지긋이 눈을 감고 마치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듯 했다. 나는 매우 거북해졌다. 가슴속에는 강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나는 거침없이 생침을 삼켰다. 전화는 이순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퍼뜩 이런 생각이 났다. 참자 젬마는 시집갈 사람 틀림없이 김 계장님이란 자가 신랑될 사람인가 보다. 둘은 삼분쯤 수화기를 거점으로 뺨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이 나의 등허리에 밀착되고 있었다.
나는 가쁜 숨길조차 몰아부쳤다.
젬마씨, 젬마씨,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나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틀림없이 이 간절한 호소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때는 몰랐다
『토마스씨, 수화기를 놓으세요』
나는 수화기를 놓았다.
『역시 토마스씨는 순진하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애수를 띠었다.
나는 쳐다보았다. 그녀의 글썽거리는 눈물 그리고 창백해지는 얼굴.
『젬마씨, 갑자기 어디가 아프세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웃는다. 나는 몹시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하면 성모님께 기도를 해보세요 하고 위안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윽고 저만큼 떨어지며 이렇게 말했다.
『토마스씨, 저는 곧 결혼할께예요. 토마스씨는 아직 결혼같은건 꿈도 안꾸고 계시죠?』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듯한 한숨을 흘렸다. 이토록 사랑을 품고있는 사람에게 어쩜 이다지도 서글픈 소리를 들려주고 있을까.
나는 한숨을 뒤섞어 말했다.
『아무튼 젬마씨와 결혼하는 남자는 행복할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토마스씨?』
그녀는 새삼스럽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가 역겨웠다. 그러나
『젬마씨는 결혼하는것 두렵지 않으세요?』물었다.
나는 실상 이렇게 묻고 있었다.
젬마씨는 나를 저버리고 딴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요?
『두렵긴 왜 두려워요. 남자를 만나는데요』
역시 젬마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누가 뭐라든 나는 일어서 버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방을 나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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