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화는 경민에게서 김종후 교수의 사모님이 그의 차 안에서 의식을 잃었던 일들이며 그 부인을 병원에 데려다 정신을 차리게 했던 일을 그리고 경민이 문득 내가 왜 이 일에 이렇게 말려 있는가를 돌이켜보고는 홀연히 그곳을 빠져나와 소주 한 병을 순식간에 들이켰다는 이야기까지 모두 들었다.
--그 후 네 생각이 나더군. 그리고 또 누이 생각도 몰려들어 나는 조금 어쩔 줄 몰랐어.
형화가 회사에서 김 부장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경민은 길거리와 병원에서 그렇게 난리를 치루고 있었다. 그리고 경민이 아침의 사고에 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오히려 내가 무슨 까닭으로 그 일을 알겠느냐면서 핀잔스럽게 웃어 넘겼다.
형화는 경민의 차 뒷좌석에 묻어 있는 검은 핏자욱을 보면서 세상 일은 전혀 자기와 관계 없는 일 속에서조차도 관련되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김 교수의 주검을 경민이 실어 나른 것처럼, 경민을 김 부장이 실어 나를 수도 있겠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게 스쳐 지나는 어떤 타인에 의해서 형화의 주검이 실어 날라지던지 알려지게 될 것인지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경민의 차는 또 거리를 달렸다. 사람들과 차량들 모두가 움직임 속에서 바삐 스치고 있다. 과연 그들 중 어느 것이 형화를 순간적인 죽음으로 이끌 것인가? 또 그들 중 누가 형화의 마지막 길을 도울 것인가?
차는 점차 시가지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생활이란, 달리 표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혼자만의 일은 결코 아닌 것이라고 형화는 깨달았다. 우리 모두와 얼키고 설키어 상호 작용을 하는 유기체. 그렇다. 아마 이것이 살아가는 것이리라.
--경민씨 누이도 화장을 했다고 하셨죠?
--으음.
--화장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헤헤, 오징어라니까.
점점 줄어드는 밤의 불빛에 그의 잠결의 머리가 조금은 말끔해져 보이기 시작했다.
--오징어가 된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구요.
--가루가 되어서 항아리 같은 그릇에 담겨 나오지. 이렇게 해서 사람의 몸이 한 줌의 재가 되는 거야.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형화는 얼핏 이 귀절을 기억했다. 그러나 이것처럼 믿을 수 없는 일이 또 없었다. 왜 나의 몸이 흙이란 말인가. 그것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신화처럼 우리에게 어떤 감흥을 일으킬는지는 몰라도 실제 우리가 흙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우스꽝스러웠을 뿐이다.
--누이가 화장을 마치고 하얀 종이 상자 곽에 담겨 나온 후 아버지는 이미 나의 집요한 고집에 체념해 버리셨는지 집으로 가라는 말없이 같이 차에 오르셨지. 우리는 한강 상류에 있는 어느 절로 차를 몰았어.
--절로 갔어요?
--그리고 그 흰 가루는 스님의 이상스런 중얼거림과 동시에 강물에 뿌려지더군.
--누가요?
--글쎄, 그게 누나라는 실감이 도통 나질 않더군. 우리도 화장을 하면 이 손가락이며 뱃가죽이며 또 발톱까지도 그 하얀 가루가 될 것이 분명한데 말이야-…
--가루가 담긴 바닥까지 모두 털어버리고는 하얀 상자를 물에 던지더군. 그리고 그것을 쌌던 종이도 던지고 또 어깨에 메고 왔던 길고 하얀 천까지도 모두 강에 던졌어. 우린 그것을 한참이나 쳐다보았지. 스님은 계속 중얼거렸어. 아버지는 눈물을 한 방울쯤 흘리고 침통한 표정이었고 나는 이제 물속으로 침통히 잠겨들어가는 하얀 천을 보고는 마치 누나가 물속에 빠져들어 이제 치맛자락마저 잠기는 것 같은 착각에 누나하고 고함지르며 물가로 달려들기도 했어-(하얀 천?)
--아버지와 나는 또 한 번 옥신각신 부닥거렸지. 급기야 아버지가 나를 꼼짝 못하게 하려는 것인지 슬픔에 겨워서인지 알 수는 없어도 두툼한 팔로 날 꽉 껴안았을 때에야 나는 발광을 그쳤어. 그리고 부자간에 소리없이 울어버렸어.
-…
--야 뭐 시시하다. 무슨 신파 연극하는 것 같아. 집어치우자. 결국 오징어니까.
--그럼 김 교수님도 그렇게 뿌려지겠네요.
--그럴 테지. 강에 뿌리기도 하고 산에 뿌리기도 하더군.
--하얀 천이 한강물 위로 떠내려오는 것을 아침에 보았어요. 어느 한복 입은 여자들이 배 위에서 아침부터 춤을 추고…그것도 관계 있는 일이예요.
--이 바보야, 그게 무슨 춤을 추는 거야. 손을 벌려 불공을 드리고 극락으로 가시라고 비는 거야. 어휴 너 같은 어린애와 무슨 말을 하겠냐.
--그게 불공이라고요?
--그래 화장해서 강물에 뿌리면서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들이 말하자면 기도드리는 거야. 천당이나 극락에 가게 해 달라고.
--그 다음에야 그게 어디 사람이니 물이든지 흙이든지 그렇게 되겠지.
차는 제삼한강교의 한산한 길을 달려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움푹움푹 파여진 모래사장, 그리고 멀리 조용한 한강이 줄 지어선 아파트의 휘황한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경민의 죽은 누이가 흘러내려간 길을 살아있는 사람들이 불 밝혀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내일이나 모래쯤이면 이곳을 흘러갈 김 교수의 마지막 길을 벌써부터 밝게 비추어 준비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러나 이 길을 지나간 사람들은 이 두 사람뿐일 것인가.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수천 수백 년 동안 이곳에서는 줄 지어 낳고 죽고 하는데 하물며 두 사람뿐이랴.
그렇다면 아직껏 형화는 강물의 무엇을 보았는가. 그 치르륵대는 파도? 태양에 반사되는 눈부신 강물? 푸르른 하늘이 내려앉은 오염된 물?
그러나 아직껏 형화가 실체로서 본 것은 없다.
그것은 물체임에 틀림없지만 물체로서만은 표현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또 죽어지는 의미를 입증하고 있는 강물인 것이다.
형화는 그렇게 흐르고 있는 밤의 강물을 보면서 이제사 자신이 어딘가로부터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주는 충격에 대한 아픔이며 새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한 희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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