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희순은 어렸을 때부터 순진하고 명랑하고 상냥한 성격에다 재주와 미모가 비범하였으므로 모든 이의 감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미 어린 나이에 궁녀로 뽑히어 대궐에서 자랐는데 거기서도 그의 순결하고 순박함이 동료들보다 뛰어나서 윗사람들의 총애를 받았다.
희순이 아직 15세가 못되었을때의 일이다. 당시 16ㆍ7세의 어린임금 순조가 희순의 미모에 반하여 그를 유인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희순은 아직 미신자였지만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용기로 단연 임금의 유혹을 물리쳤다.
형조의 보고에 의하면 박희순은 일찌기 창녕위궁의 내인이었었다. 창녕위란 다름아닌 순조의 사위 김병주이고 순조의 둘째딸 복온 공주가 이 사람에게 출가했었다.
그런데 희순이 국문과 한문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복온 공주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전하는데 아마 이것이 인연이 되어 창녕위궁의 내인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30세가 되었을 무렵에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즉시 믿으려 했지만 궁궐에 메인 몸에다가 김대비의 각별한 총애로 궁녀들을 감독하는 자리에 있었으므로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천주교를 실천하려면 대궐의 온갖 미신행위를 피해야 했으므로 희순은 용감히 결심하고 결국 병을 핑계하여 출궁할 허락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의인이어서 천주교를 배척하므로 집을 나와 남대문밖 조카집에 가서 같이 살면서 차례로 조카와 온 집안을 권면하여 모두 입교시켰다. 이때 언니 마리아하고 같이 살았는데 언니도 후에 순교하여 자매가 나란히 복녀의 반열에 올랐다.
궁궐을 나온후부터는 사치와 향락에서 허송한 세월을생 각하여 금욕생활을 하였고 특히 의식의 절제를 하며 모든 본분을 완전히 채우고저 열심을 배가 하였다.
박해가 일어나 그의 집안이 고발되자 조카는 집을 팔아 버렸다. 그래서 루시아는 남은 식구를 데리고 같은 궁녀출신인 전 아가다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런지 불과 수일후인 3월 2일(4ㆍ15) 두 집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피신방법을 상의하고 있을때 급작히 포졸들이 달려들었다. 이때 루시아는『모든 것이 주명이 아닌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포졸 앞으로 나아가 소란을 진정시키고 전 가족을 격려했다. 포졸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하고 나서 포졸을 따라 기쁘게 포도청으로 향했다. 이때 아주 나이어린 루시아의 조카 박 베드로는 같이 잡혀 갔었는데 석방되어 후일 두 고모가 잡히어 순교한 사실을 상세하게 증언하게 되었다.
잡힌 교우 가운데 궁녀도 끼어있다는 소식을 듣자 대왕대비는 괴심타고 생각한 나머지『비록 전에 궁녀였던 사람뿐만 아니라 현재 궁녀일지라도 증거가 확실하면 궁의 대표에게 알린후에 체포해도 무방하다』는 격려의 지시까지 내리게 되었다. 포장이 루시아에게『궁녀는 여염집 여자와는 크게 다른데 너는 왜 사학을 하느냐』고 물었다.
『저는 결코 사학을 한 적은 없습니다. 천주를 공경함은 사람마다 할 의무입니다』이렇게 루시아는 천주교가 정학이오 사학일수 없음을 변호하였다. 포장은 루시아를 형조로 보내기로 하고 이에 대하여『희순이 비록 궁인이지만는 이미 집에서 체포되었으므로 다른 죄수의 예에 의하여 추조로 이송하겠습니다』라는구실을 붙였다.
형조로 옮겨간 후에도 세 번 형신을 받았고 그때마다 곤장 30도를 맞았다.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났으나 루시아는 태연하게『이제서야 우리는 주모의 만고만난을 조금 이해할수 있다』고 말하면서 추호도 어려워하는 형상이 없었다. 그러나 며칠후 그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고 기력이 다시 건장해지니 포졸들은 이를 요술로 여겼다고 한다.
루시아는 도저히 배교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형조 판서는『희순이 동류와 얽혀 밤낮없이 깊이 빠져서 행동이 모두 요사하고 허황하여 입으로 중얼거리고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다 사술이고 죽기를 맹서하면서 뉘우치지 아니하니 이는 불대시참할 죄인입니다』고 보고하였다.
루시아는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돌려보게 하였다. 이 편지의 내용이 한편으로는 주모와 천신성인의 은혜를 찬송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말이었기 때문에 이 편지를 보는 사람이 다 깊은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법장으로 떠나기에 앞서 감옥의 교우들더러 같이 순교의 길을 걷자고 위로하고 격려한 다음 태연한 용모로 수레에 올라 기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서소문밖 형장에 이르러 동료 8명과 같이 참수치명하니 때에 그의 나이 39세였다. 언니도 동생 루시아와 같이 사형선고를 받기는 했으나 국법에 같은날 형제를 죽이는 것을 금하고 있으므로 부득이 동생과 이별해야 했다.
감옥에서 동고하며 의지하고 지내던 교우들도 다 먼저 치명한 루시아를 생각하며 그의 늘 침착하고 애정에 찼던 얼굴을 잊을수가 없다고들 하였다.
치명하기전 어느날 루시아는 담 너머로 형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청이 하나 있는데 내 목을 벨 적에 냉정을 잃지 말게. 칼날을 잘 세워두었다가 결코 헛칼질을 말고 단번에 내 목을 잘라주길 바라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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