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한 바와 같이 기해년에 박해가 발발하자 최초의 처형은 이 해 4월 12일(5ㆍ24) 서울 서소문밖에 거리에서 집행되었는데 이때 위주치명한 이는 모두 아홉분으로서 남자가 3명이고 나머지 6명은 다 여교우였다. 이 6명의 여교우 중에도 김 막달레나 한 발라라 김 아가다 세 분은 이미 3년전에 같이 잡히어 무려 3년간 옥에서 고초를 같이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인연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김 막달레나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믿었고 동정을 지킬 원의마저 있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교우에게 출가하게 되었다. 중년에 이르러 남편과 자녀들을 모두 여의게되자 6순의 노모와 한가지로 문밖「애고개」로 이사하여 살면서 망건을 만드는 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갔다. 어머니의 성질이 몹시 괴벽했으나 잘 참고 순종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막달레나의 효심이 너무나 지극하여 인내하고 순명하는 그의 표양은 사람마다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도리에도 밝아서 외인을 권면하고 임종대세를 부치는 것이 많았으며 늘 치명할 원의가 간절했었다.
한 발바라는 김 막달레나집에 같이 거처하였고 망건 만드는 일을 거들며 열심히 수계하였으므로 당시 교우들이 한결같이 이 두 사람을 뛰어나고 덕행이 있는 교우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한 발바라는 어머니가 교우였으므로 어려서 이미 교리를 알고 봉교할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차에 외교인에게 출가하고 말았다. 하루는 친정에 왔다가 김 막달레나를 만나 그의 권면하는 말에 황연히 깨닫고 이래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설흔살적에 남편과 3남매를 모두 여의게 되니 친정으로 와서 독실히 수계하였는데 자주 재계하고 냉담자를 권하며 외인을 교회로 인도했다. 또한 죽어가는 유아만 있다면 쫒아가서 대세를 부침으로 많은 영아의 영혼을 건졌다.
김 막달레나와 한 발바라는 병신년(1836년) 9월에 같이 잡혀 포청으로 끌려갔다. 김 막달레나는 포장앞에서 천주십계도리를 설명하였고 여러번 중한 형벌을 받았지만 용감히 감당해냈으며 일보도 굽히는 일이 없었다. 한 발라라도 판관앞에서 천주십계도리를 설명하였고 형벌중에서도 외모에 흔연한 빛이 역력했다고 한다.
김 아가다도 이상의 두 교우와 같은때 잡히었으나 김 막달레나의 집에서 잡혔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아가다는 원래 머리가 둔해서 언니가 늘 지성으로 인도하고 가르쳤지만 믿음이 독실하지가 못했다. 게다가 아가다의 남편과 친척이 모두 외인이어서 집에 미신이 심했다. 하루는 언니가 와서 동생더러『이런 귀신들은 다 허망한것이니 믿지말라』고 타일렀더니 아가다는 즉시 미신을 끊고 세속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신덕은 이렇게 굳었지만 재주가 둔해 12단을 외지못하여 영세를 받지 못했다.
포장의『너 천주학을 한다니 참말이냐』고 묻는말에 아가다는『다만 예수 마리아만 알뿐 그밖의 것은 모릅니다』고 대답했다. 『네가 흑형을 당해도 예수 마리아를 배반 못하겠는가』『죽어도 배반못하겠습니다』혹독한 고문중에서도 아가다의 대답은 이같을뿐 다른 말이 없었으니 그의 굳은 의지와 항구한 믿음이 다 탄복할 따름이었다. 드디어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의 교우들은 웃으며『보라 예수 마리아만 아는 아가다가 저기온다』고 하며 환영했다. 옥중에서 대세를 받았다.
드디어 4월 12일 옥에 있은지 3년만에 3인이 같이 순교를 완성하니 막달레나는 나이 66세 발바라는 48세요 아가다의 나이는 50세였다.
이날 같이 순교한 또하나의 여교우 박 안나는 그의 외손녀 서 수산나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한강변에 거처하면서 어머니와 같이 성교를 봉행하고있었다. 머리가 둔하여 비록 교리에는 밝지 못했을지라도 진심으로 천주를 사랑할 마음은 있었다.
18세에 교우 태문행에게 시집가서 2남3녀를 낳아 타당하게 가르쳤다. 집이 가난한 편은 아니지만 세상 사물을 탐내는 마음이 적었고 매양 예수의 5상을 생각하며 눈물을 금치못했다.
기해년 2월에 남편 태문항 장남 태광천과 한가지로 잡혔다. 남편과 장남은 곧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안나는 관원이 백단으로 꼬이고 달랬음에도 불구하고 굳게 마음을 먹고 굽힐줄을 몰랐다. 배교한 남편과 아들이 자주 찾아와서 유혹했으나 그들의 육정을 일축했을 뿐더러 도리어 과거를 뉘우치라고 그들을 권고했다. 비록 살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났을지라도 안나는 무릎을 꿇고 신공 바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결국 그를 형조로보냈다.
형조에서 형관이 네 남편과 자식이 다 석방되었으니 너도 한 말만 하면 나아가서 같이 살것인데 그것이 세상복이 아니냐』고 말해보았으나 안나는『각자는 다 자기주장이 있습니다. 나로 말하면 주를 위하여 죽기가 소원입니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감옥살이 3개월만에 김막달레나 등과 한가지로 목을 베이어 순교하니 때에 그의 나이 57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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