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아버지의 엄숙한 얼굴을 쳐다보고 혈육의 정이라는 것을 찾으려 해왔다. 그러나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에게서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젬마야, 지금도 토마스를 생각하고 있니?』
딸이 지금껏 토마스를 생각하고 있다면 호되게 꾸짖어줄 요량으로 아버지는 물었다.
젬마가 이런 것을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마에 주름살이 세워지는게 눈에 띄여서 잘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아녜요 아버님은 저를 그렇게 보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 만사가 조용해지리라 싶었다.
『암 그래야지 내가 교회라는 것을 애당초 몰랐다면 그런 비렁뱅이 같은 자식들을 어떻게 알게되었겠니. 너는 알아둬야 해 우리 집안의 혈통이란걸 말이다.』
아버지는 제법 언성을 높혔다. 구교회 가정에서 이런말이 나온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쯤되면 메실주라도 따뤄 드려야 일이 무난해진다. 그렇지만 그녀는 시키지 않으면 그럴수가 없게되었다. 그녀는 아버님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네, 우리 집안은 아버님을 주력으로 지방에 널리 알려져 있잖아요. 어머님도 오늘밤엔 아버님의 얘기를 좀 하실꺼예요.』
아버님은 웃음을 늘어놓는다. 자못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녀는 재떨이의 뚜껑을 열어드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담배 피우세요.』항상 자랑스럽게 피우는 은하수를 아버지는 양복 포켓에서 꺼냈다.
그녀는 담배를 피워무는 아버지의 동작을 살펴보았다. 기분이 좋을때는 동작이 느렸다.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이건 불패지수가 높은것을 나타내고 있는것이다.
『젬마야 냉수를 한그릇 떠와. 너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긴히 할 얘기라면 자신의 혼사문제다. 아버지는 그것을 맘대로 처리할 모양이다. 그녀는 부엌으로 나가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김 계장이나 그 외의 어떤 교활한 놈을 점찍고 있을지도 모르리라. 그녀는 냉수를 한그릇 떴다. 그것만 그냥 가져가려니까 문뜩 매실주가 생각난다. 아버지께 매실주를 갖다드리면 의외로 좋은 얘기들만 늘어놓을지도 모르잖은가. 그녀는 매실주를 담근 항아리에서 스텐주전자로 가뜩 술을 떠냈다. 매실주의 매캐한 향기가 취기를 느끼게 했다. 그녀는 손으로 코를 막으며 술상을 차렸다. 컵과 멸치볶음 그리고 젓가락. 아버지는 딸이 무얼 꺼내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있는 모양이다. 기침소리가 유별나게 크다. 그녀는 토마스에 관한 여러가지 하고싶은 말들을 아버지의 기분상태를 봐서 할 작정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술상을 아버지께 갖다드리고 그녀는 문닫는척 나와버리려고 해봤다. 아버지가 냉큼 노려본다. 할수없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지 술 드시고 싶지 않으세요?』
『왜 아니람 넌 확실히 영리하구나. 내가 네게 기대를 걸만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야』
아버지는 매실주를 컵에 부어서 홀짝 마신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해본다. 아버지가 걸고있는 기대라는 것에 대해서 만약 그게 어처구니도 없는 것이라면 한사코 항의하리라.
『젬마야, 나 오늘 신부님을 만나서 얘기했어. 너에 관한 얘기를 했거든』
아버님은 또 한 컵 따루며 홀짝 마신다. 토마스가 공장을 그만둔게 아버지에게도 어느정도 타격이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이런 아버지가 가엾게 보일수밖에 없다.
『아버지 신부님께 뭐라고 그러셨어요?』
아버지는 딸을 흘끔 쳐다보고
『토마스에 관한 얘기를 했지』
『네!』
그녀는 앗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아버지께 속마음을 들킨것이다.
『너도 웬간히 속좀차려, 내 입에서 토마스의 얘기가 나오니까 금방 오금을 못펴는구나』
『아버지 그게 아니예요』
그녀는 다시 무표정해지려 애썼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고 그래. 기왕 끄집어낸 얘기니까 해야지』
아버지는 다시 주전자를 기울이며 술이 쪼르르 흘려나오는걸 탐스럽게 쳐다본다.
그녀는 아버지의 동작을 구경하면서 내심 웃어주고 싶다.
아버지는 컵이 찰찰 넘치자 홀짝 마신다.
그리고는 젓가락으로 멸치를 집으며 딸이보는 앞이라 제법 폼을 잡는다. 그런대로 연기가 만점이다.
『자, 이젠 얘길해야지. 난 말이야. 이 아버지는말이다. 토마스를 사위로 맞을 생각은 없는거야. 그러나 신부님께는 그런 당돌한 얘기는 할수가 없거든 그런데 너 요즘 왜 말수가 적어졌니? 밥도 몇끼나 걸르면서 말이다』
그녀는 자기짐작이 맞아들었구나 하고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버지께는 슬픈빛을 보여서도 안된다. 너무 기쁜빛을 보여서도 안된다. 어쨌든 아버지는 분에 넘치는 행동을 금했다.
『아버지 제가 왜 말수가 적어졌다고 그러세요. 아버지는 요즘 통 저에게 관심도 가져주시지 않으셨잖아요』
그녀는 약간 언성을 높혔다. 이 때문에 단박 아버님의 매서운 눈총이 날카로왔다.
『벌써 다 까먹었구나 예기 무례한놈』
그녀는 얼른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마에서 곧 땀이 내버릴 것 같다. 아버지의 훈계가 또 시작될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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