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가다는 역시 복자인「호영」(베드로)의 누님이다. 남매는 원래 경기도 이천땅 「구월」에서 태어나서 부모밑에서 자랐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는 이미 교우였으므로 다행히 대세를 받고 선종했다. 어머니는 비록 교우였지만 도리에 밝지 못한 탓으로 어린자녀들의 종교교육을 등한시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서울로 이사왔다.
어머니의 종교적 무관심 때문에 결국 아가다는 외인에게 출가했다. 그때 나이 17세였다. 그러나 애를 하나도 낳지 못한채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말았다. 남편을 잃고나서 아가다는 친정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동생과 같이 살았다. 부친이 남긴 조그마한 가산마저 탕진하게 되니 위로 노모와 아래로 어린동생을 데리고 살아가자니 그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기해일기」의 저자도『그때 겪은바 고통을 다 어찌 말하리오』이렇게 실로 당시의 고생이 이루 형언키 어려웠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가다는 이와 같이 평생을 곤궁가운데서 지내야 했을지라도 언제나 안색이 화평하고 조금도 걱정하는 빛이 없었다. 뿐더러 아가다의 사람됨이 겸손하고 정중하였으므로 모두가 그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고 그를 사랑하고 사모하였다.
아가다는 삯바느질로 집안살림을 겨우 연명시켜 나갔다. 그러나 남매는 이 같이 가혹한 가난을 참아받으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래서 그때의교우들이 이 남매의 덕행과 착한표양을 늘 얘기하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가다의 집이 포졸의 기습을 당한 것은 을미년(1835) 정월이었고 그때 그의 집은 한강변「무쇠막」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때 남매는 포졸의 기습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고 따라서 잡히는 순간에도 피신이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때 베드로는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문간에서 대기중이던 포졸에게 잡혔고 이어 아가다도 잡혔다.
이 광경을본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졌다. 아내도 잡으려는 포졸들을 향하여 베드로는『이 사람은 죄가 없으니 내버려 두시오. 죄가 있는 것은 우리뿐입니다.』고 하며 아내만은 놓아주어 어린것과 노모를 돌보게 해달라고 간청했더니 마침 이웃에 사는 포졸이 감격하여 그의 아내를놓아주고 남매만을 붙잡아갔다.
포청에 압송되어 포장이『너희들이 천주학을 한다는 말이 옳으냐』고 묻는말에 남매는 한가지로『그렇습니다』고 대답했다. 『배교하고 일당이 있는 곳을 대라』『천주는 우리의 대군대부이시라 우리는 배주하지 못하겠고 또한 일당을 대면 말로서 남을 상해함이 되므로 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자 형리를 시켜 주리를 틀게하였다. 먼저 동생이 의식을 잃고 땅에 넘어지자 누이가 격려했다. 격려하는 말을 듣고 형리들이 아가다를『고약한 계집 같으니! 동생을 참회시키기는 커녕 도리여 격려할뿐이라』고 모욕하며 매질하기 시작했다. 의식을 회복하자 베드로는『누님, 왜 그런 말을 해서 그런 욕을 당하십니까』하고 누님을 위로하였다. 아가다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종시 한결같이 견고하게 머물렀다. 또 한번은 아가다를 옥에서 끌어내어 무수히 난타하였고 마침내는 아가다의 옷을 벗긴 다음 높이 매달고 능욕하며 그의 온몸을 마구 때렸으나 아가다의 대답은 한결같이『배주 못합니다』였다.
베드로는 1835년 11월 29일자로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 자기와 누이가 받은 문초와 고문 생활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 편지는 불행히 오늘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 일부가 다행히 모방(羅) 신부가「빠리」본부에 보낸 편지에 남아있다. 이 편지에 의하면 남매는 1835년 11월 6일 법정으로 끌려나가서 문초를 받았다. 베드로는 누이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누님도 문초를 받았는데 나와 같이 진리를 증거하였습니다. 이에 재판관은 우리들을 몹시 매질하라고 하였습니다. 형리들이 매질을 멈추었으나 누님은 기운이 필진하고 무거운 칼 밑에 몸이 움크러들어서도 항상 순교하기를 절원하고 천주께 순교할 은혜 주시기와 도와주심을 구하여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결국 남매는 형조로 이송되었다.
이때 허태복이란 교우 새우젓 장수가 자주 감옥엘 드나들며 남매의 심부름도 하였으므로 감옥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 수가 있었다. 남매는 수많은 혹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순도 굴복한 적이 없고 언제나 안연한 기색으로 조금도 낙담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옥에 있은지 4년동안 아가다의 착한 표양에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옥졸까지도 성교도리가 과연 아름답다고 칭송했다. 기해 4월 12일 서소문 형장을 향해 수례에 올랐을 때에도 아가다의 안색은 여전히 평온하였고 형장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리자 성호를 긋고나서 같은 침착한 자세로 칼을 받고 위주치명하니 나이 56세였다. 남매는 4년동안 옥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지냈다. 베드로는 누이와 한가지로 같은날 순교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의 소원은 성취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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