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의 종속성
1. 창조에 대한 진리는 크리스찬 신아의 대상이며 내용입니다. 오로지 계시에서 그것이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사실 성서 외에 신화적 천지창조이야기에는 그것이 아주 막연하게만 나옵니다. 그리고 고대 철학자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이라도 온전히 완전한 존재, 절대자라는 높은 신개념에 도달했지만 그들의 사고에 창조는 빠져있습니다. 인간지성은 다른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세계와 우연유를 (즉 필연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절대자에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피조물」로서의 이종성의 공식-따라서 창조에 대한 진리를 바탕으로-은 원래 하느님의 계시에 속하며 이런 뜻에서 그것은 신앙의 진리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고백
2. 그것은 사도신경과 같은 가장 오래된 신경들에서부터 신앙고백 서두에서 선포되고 있습니다. 『나는 믿나이다……천지의 창조주 하느님을』. 니체아-콘스탄티 노플 신경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믿나이다. 한분이신 하느님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마지막으로 바오로 6세 교황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백성의 신경『우리는 믿습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같이 유형한 세계와 천사라 부르는 순전한 영들같이 무형한 세계를 창조하시고 각 사람의 불사불멸의 영혼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창조주의 의미
3. 크리스찬 신경에서 하느님에 의한 세계와 인간창조에 대한 진리는 그 내용의 풍요로움 때문에 기본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행위의 결과인 세상의 기원에 관해 언급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을 계시하기도 합니다.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느님(히브리1,1)께서는 그분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 그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그분이란 것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창조주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성서 곳곳에 창조언급
4. 성서(신ㆍ구약)는 참에 대한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서의 첫 권인 창세기는 이 진리의 단언으로 시작합니다.『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세기1,1)많은 다른 성서 구절들이 이 진리가 이스라엘의 신앙에 얼마나 깊이 배어들었는가를 보여주면서 이 진리를 되풀이해서 말해줍니다. 적어도 몇 개만 보기로 합니다. 시편에는 이렇게 나옵니다.『야훼님 것이로다. 땅이며 그 안에 가득찬 것이, 온 누리와 거기 있는 그 모든 것이 바다위에 그 터전을 마련하셨도다.』(23<24>1~2)『하늘도 당신의 것 땅도 당신의 것, 땅덩이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당신이 지으셨나이다.』(88<89>, 12)『당신이 만드셨으니, 바다도 당신의 것, 마른 땅도 당신의 손수 만드시었네.』(94<95>,5 『주님의 사랑은 땅에 가득하도다. 야훼님의 말씀으로 하늘은 만들어졌고…주의 말씀계시자, 이루어 졌고, 주의 명이 계시자 존재했나니』(32<33>,5~6,9)『너희는 받아라 하느님의 축복을, 하늘땅 만드신 당신의 축복을』(113<114>,15)지혜서 저자도 같은 진리를 고백합니다.『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며 자비로우신 주님, 당신은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고…』그리고 예언자 이사야는 일인칭을 사용하여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나 나훼가 만물을 창조하였다』(44,24)
하느님은 피조물 안에, 피조물은 하느님 안에
신약에 나오는 증언들도 그에 못지않게 명백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요한복음 서두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한 처음 말씀이 계셨다…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1,1,3) 히브리서쪽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우리는 믿음이 있음으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11,3).
5. 창조에 대한 진리는 하느님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에의 해 존재에로 부름 받았다는 사상을 표현합니다. 성서에서 우리는 이것에 대해 명백히 말하는 본문들을 발견합니다. 마카베오서에 기록된 일곱 야들을 가진 어머니는 이야기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 어머니는 죽음의 위협을 앞에 두고 제일 어린 아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격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아라…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류가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마카베오하7,28). 로마서는 이렇게 말 합니다『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4,17)
따라서 「창조」는 무에서 만들어 존재에로 부르는 것, 즉 무에서 한 존재를 형상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서언어는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는 창세기 시작말씀에 이미 나오는 이 의미를 우리로 하여금 엿보게 해 줍니다.「창조했다」는 말은 히브리어「바라(bara)」의 번역인데 그것은 비상한 능력의 활동을 묘사하는데 그러한 활동의 주체는 하느님뿐입니다. 유배 후 반성의 결과로 하느님의 처음의 개입에 대한 이해를 더 잘하게 되었고 결구 마카베오하서에『있는 것들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닌』(7,28)생산으로 제시됩니다. 교부들과 신학자들은「무(無)에서의」창조(creatio exnihilo 더 구체적으로 exnihilo sui et subiecti)를 말함으로써 신적 행위의 의미를 더 명확히 했습니다.
창조행위에서 하느님은 어떠한 선재(先在)물질도 배제하는, 새로운 존재의 배타적이고 직접적인 원리입니다.
하느님의 내재성과초월성
6. 창조주로서 하느님은 어떤 의미로 창조된 존재의 「밖에」 있고 창조된 것은 하느님「밖에」 있습니다. 동시에 피조물은 하느님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전적으로 빚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완전히, 전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에 그 기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창조능력(전능)을 통해서 하느님은 피조물 안에 있고 피조물은 하느님에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느님의 내재성은 그분이 존재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하느님의 초월성을 감소시키지 않습니다.
7.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아레오빠고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내가 아테네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알지 못 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온 그분에 관해서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 십니다…』(사도행전1723~24).
많은 신들을 인정한 아테네시민들(이방 다신교) 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창조주이신 한분의 하느님에 대한 이런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창조에 대한 진리가 서로 다른 종교들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상봉점을 이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듯합니다. 아마도 창조에 대한 진리는 성서 속에 담겨있는 것만큼 충분히 명백한 개념들을 알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다양한 종교 속에 내재적으로, 그리고 기초적으로 뿌리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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