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첸티 추기경이 항가리를 떠나올 때 성청과 항가리정부 간에는 민첸티 추기경의 재입국 금지와 항가리정부나 정부의 관심사에 해를 미치는 여하한 발언이나 출판도 금지한다는 묵계가 있었다.
바로 이 두 조건은 민첸티 추기경이 망명의 서러움 위에 설상가상으로 다시한번 아픔과 비애를 되씹게하는 미끼가 될 줄이야 추기경 자신인들 짐작 했으랴?
민첸티 추기경은「로마」에 잠시 머무른 후 곧「비엔나」에 있는 항가리신학교에 여장을 풀었다. 그가 다른 어느곳보다 이곳을 택하게 된 이유는 이곳에서 항가리까지 불과 50마일밖에 안 떨어져 조금이나마 더 양떼 가까이 있겠다는 목자 본래의 애정의 솟구침이었으리라. 그가「비엔나」에 오기전부터 오지리정부 측에서는 민첸티 추기경의 입국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그것은 그로 인해 오지리와 항가리간에 좋지않은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까닭이었다. 결국 오지리정부는 민첸티 추기경이『정치적 입장을 떠나 개인적으로 살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고국을 떠나 망명생활을 시작한 민첸티 추기경에게는 항가리에 두고 온 양떼 외에도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양들이 목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비엔나」에 정주한지 7개월이 지나면서부터 그는 72년 5월 서독「함브륵」과 동년 8월 벨기의「부릇셀」방문을 필두로 해외사목 시찰을 시작했다. 항가리의 수호성인이며 초대왕이었던 성 스테파노 탄생 1천주 기념행사와 곁들여 이뤄진 이 방문에서 민첸티 추기경은 항가리 국내 가톨릭의 상황에 대한 성청과 항가리간의 대화가『전혀 진전이 없다』고 꼬집었다.
그의 이같은 비난은 1964년부터 시작된「바티깐」-항가리 공산정부간의 외교관계가 자신의 항가리 출국으로 개선되리라는 양측의 주장이 빗나갔기 때문.
73년도에 접어들면서 그의 해외사목 시찰은 81세라는 고령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숱한 화제를 뿌렸다
그는 미국을 2차례나 방문했다. 「뉴욕」에서「로스안젤리스」로「달라스」에서「시카고」로 쫓아다니며 가는곳마다『교회와 신앙에 충실하고 가정의 성화와 생명의 신성함을 깨달으며 항가리의 문화적 유산에 충실할 것』을 권면했다.
1973년 10월「뉴져지」를 방문했을 때 가진 기자회견에서『나는 오랫동안 비인간적인 대우와 압박을 받아왔기에 나의 특별한 의무는 잃어버린 항가리의 자유를 되찾기위해 말하는 것』이라고 못박고『만일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진리와 자유를 증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척추없는 인간집단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서거 4주전 베네즈웰라의「카라카스」를 방문했을 때는『죽을때가지 자유와 정의에 입각한 인간존엄성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재다짐했다.
동서간의 화해노력에 의해『아무도 종교박해와 _포가 계속되는 한 참된 화해를 말할수 없다. 공산국가들은 인권을 전혀 무시하고 화해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역시「자유가 존재한다」는 그들의 허위선전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쌍방을 책했다.
이보다 앞서 71년 10월「로마」서 NC기자가 항가리에서의 생활을 묻자『나는 과거 15년동안 나의 항가리 생활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적어왔다』면서 자서전은 세계 여론과 교회가 관계되는 것이므로『나는 나의 책에서 진리를 말하겠다.
나는 어느 누구를 궁지에 몰아넣고 싶지 않으며 오직 전체의 진리를 말하고자 한다』고 했다.
바로 이 자서전이 73년 7월에 완성되어 민첸티 추기경은 그 사본을 교황께 보냈다. 교황 바오로 6세는『자서전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그 출판은 항가리교회에 악영향을 미칠것』을 경고했다고 그는 후에 서술했다. 그 후 몇 차례나 자서전을 출판하려 했으나 성청의 끈질긴 만류로 지난해 11월까지 연기됐었다. 민첸티 추기경의 이같은 움직임을 항가리정부가 결코 가만둘리 없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항가리정부는 교황께 민첸티 추기경의 「에즈테르곰」대교구장직 및 항가리수좌직 파면과 그의 성청여권 취소 그리고 자서전을 폐기해야만 항가리 종교자유의 확대와 젊은이들에게 종교교육을 허용하겠다고 위협해왔다.
73년 11월 민첸티 추기경은 대교구장 사퇴를 종용받았다. 그러나 그는 교황께『항가리 국민들에 대한 자유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것이 자신의 공적 및 교회적 의무로 생각하기에 항가리교회가 공산당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사임할수 없다』는 뜻을 밝혔었다.
그러나 전체교회를 한 몸에 짊어진 교황의 심정인들 민첸티 경의 마음을 어이 헤아리지 못했겠는가?
결국 74년 2월 5일 그의 대교구장직 파면이 전해지자『나자 신은 이제 완전히 그리고 송두리째 추방됐음을 알게됐다』고 비통해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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