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의 변두리를 빠져나와 차가 노량진 부근에 이르자 밤의 불빛은 다시 휘황해져갔다.
그리고 어둠 속에 보이는 강물, 질펀하게 깔려 있는 아파트와 집들, 끝이 없이 계속되는 아스팔트,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숫자가 적어지는 사람들, 줄 지어 늘어선 가로수… 모든 것들이 더욱 자세하게 투시되어지는 것 같았다.
경민이나 형화나 할 말을 잊은 듯이 침묵이 계속되었다.
형화로서는 아침의 일을 기억할수록 더욱 말을 잃는 것이었다.
춤을 추던 여인들 하얀 종이 뿡빵거리는 차량들의 크락숀 소리 한강 다리 태양 기계 일 사표 오징어 모래 교통사고 썩은 물 흙탕 신성 싫어하던 남자.
그리고 김 교수의 죽음, 이경민 산소 유서 화장 물고기 하늘 가루 빗물 시체 안치실 부패.
한강 다리 아래의 물속엔 전쟁 때 다리가 끊어져 수많은 남녀들이 서로 엉키어 벌써 삼십 년에 가깝도록 함께 드러누워 있는 것이 왜 부끄러웠을까. 강물을 따라 흐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뼈가루가 실제로 물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데 왜 그것이 부끄러웠을까. 절대적으로 하나가 된다. 경민의 누이와 김종후 교수가 하나가 된다. 물속에서.
창녀와 승려가 하나가 된다. 부모와 자식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앞으로 형화 역시 누군가와 하나가 될 것이다. 그건 누구? 아하 모두 다 함께 하나가 되어 강물을 흐르든지 땅 속에 깊이 스며들어 한 그루 나무의 영양분이 되겠구나.
그러면 형화는 물이나 양분이 되어 어느 낯 모르는 사람의 몸속으로 잠입되어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경민이와도?...
이것은 놀라운 놀이의 귀결이긴 했으나 또한 숨길 수 없는 해답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죽은 김 교수가 함께 흘러 떠내려간 강물이 수증기로 변해 하늘로 떠올라 빗물이 되어 이 땅 위에 내려오고 다시 한 모금의 물이 되어 형화의 몸속으로 스며들면 영원히 몸의 한 부분으로 남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죽은 것이 산 것이고 산 것이 죽은 것일진대는 죽어서 경민이와 하나가 되는 것과 살아서 하나가 되는 것이 마찬가지의 일이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달무리가 져 있었다. 희미한 달의 주변에는 희끗희끗 구름이 둘러쌌고 동그랗게 원을 그리는 아름다운 무지개 색깔이 밤의 기운을 돋구었다.
내일은 비가 내리려나.
형화는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달무리 주변에서 서서히 움직이는 구름들을 지켜보았다.
저것은 또 누구의 잔해가 섞여 있는 구름일까… .
이제는 형화에게 모든 것이 가까와져 버렸다. 모든 물체는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언젠가는 누군가의 형상이었고 앞으로 어쩌면 형화의 형상이 들어가 앉을 살아있는 물체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타인들도 결코 별개로 태어나 완전히 구별되어 있는 닫혀진 인간이 아니라, 항상 어느 물체를 흡수해서 살아가며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형태로 귀결되어질 동질의 인간인 곳이다.
정적 속에서 형화는 으흠, 으흠, 기침도 아닌 무슨 이상한 소린가를 자꾸만 목구멍에서 내고 있었다.
으흠, 으흠.
무어라고 설명을 하고 싶어도 말로써 표현되어지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형화 안에서의 큰 소용돌이와 깨어남이 자꾸 무언가를 소리 내게 하는 것이다.
-울음은 다 가셨어?
-으흠흠, 네.
-차를 너무 몰았더니 피곤하다. 오늘 하루의 피로가 별안간 몰려드는 거 같다.
경민은 어느 한적하게 후미진 장소에다 차를 멈추었다.
-앞으로는 누나의 산소를 그만 돌아다닐 꺼야. 김 교수가 유서에 적었던 말이 옳아.「그동안 만나서 서로의 태어나 있음을 확인시켜준 많은 생명들에 감사한다」그래, 태어나 있음을 확인시켜준 오늘 김 교수에게 감사하는 거야.
-나는 오늘 경민씨에게 우선 감사해요.
-불쾌하진 않고?
-우흣.
-야, 참새. 기분 좋다. 살아있는 게 참 신난다. 그렇지 않니 ?
-정말이예요.
-우리 오늘 기분 좋은 기념으로 무얼 어떻게 할까?
-즐거우면 되는 거지요 뭐.
-아니야.
경민은 잠시 말이 없더니 형화의 손을 당겼고 힘껏 끌어안았다.
형화는 아무런 저항감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원초적인 하나였음을 확인하며 정신 속의 꽉 막힌 고집을 시원하게 터놓는 것이 벅찰 뿐이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생명이 죽음과 하나가 된다. 물체와 인간이 하나가 된다. 타인과 내가 하나가 된다.
그래서 무지가 깨달음 속으로 흡수된다.
형화는 경민에게 안겨서 앞으로는 무슨 일이든지 깨달음 속에서 자신 있게 행할 수 있겠다고 마음먹었다.
실제로 경민과 하나가 된대도 좋았다.
으흠 으흠.
지금은 물론 내일 아침에도 한강물은 흐르겠지. 따가운 햇살은 또 이 도시 위에 떠오를 테고. 강물은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내일도 잠시 귀 속을 들려올지도 몰라.
내일도 교통사고가 날지는 모르지만 어딘가에서 또 누구가 죽어가겠지. 그리고 어딘가서는 조그만 녀석들이 태어날 테고.
끊임없이 흐르고 끊임없이 태어난다. 그리고 죽는다.
이것은 슬픔만이 아니라 살아있었던 모든 즐거움을 포괄하는 슬픔이다. 그러니 이건 슬픔이 아니다.
형화는 열심히 살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에 대한 큰 긍지를 가졌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경민의 가슴과 부딪힌다.
생명을 부여하는 모든 것과 그 원초적인 숙명에 감사해야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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