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베드로는 그의 누이 아가다와 한가지로 한날에 순교하기로 서로 약속했었으나 긴 옥생활에 기력이 쇠악해진 끝에 옥사함으로 부득이 누이보다 5개월 먼저 찬류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속명이 호영으로 알려진 이 베드로는 아주 새 사람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놀람과 칭찬을 금치 못할 정도로 나이가 들고 자라면서 열심을 더해갔다. 언행에 절제가 있고 매양 집안사람을 가르치며 부지런히 여러 교우를 권면했다. 또한 그의 성격은 원래 착하고 부드럽고 솔직하였다. 그래서 1833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얼마동안 전교한 일이 있는 유 빠치피꼬 중국 신부는 베드로의 사람됨이 성실하고 솔직함을 칭찬하고 교회일을 돌보게 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3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결혼을 했다. 이렇게 결혼이 늦어진 이유는 아버지를 여윈데다 살림마저 몹시 가난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혼하게 된 경위로 말하면 같은 동리에 마귀들린 의인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교우들이 만일 이 처녀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면 마귀가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처녀를 베드로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과연 처녀가 교리를 배우고 계명을 지키기 시작하자 그녀에게서 마귀들린 흔적이 다 사라졌다.
그녀는 감사의 뜻으로 베드로의 집에서 아주 살기를 청했다. 이후 베드로는 그녀와 결혼하고 같이 수계하게 되었다.
전번 아가다의 전기를 얘기할때 이미 말한바와 같이 남매는 을미년(1835)정 월에 한강변「무쇠막」에서 같이 잡혔다. 그런데 베드로는 잡히기 며칠전에 꿈에 이상한 것을 보았다. 누가 과거보는 구경을 가자고 권하므로 베드로는 따라가서 구경하고 있을때 누가 과거에 급제한 것처럼 기이한 풍류소리가 들렸다. 그때 옆의 사람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바로 자네야』『내가 어떻게 과거를 할 수 있단 말이야?』『자네는 임금에게 가까운 신하를 사귀어 과거에 급제한 것이야』이때 베드로가 자기 몸을 보니 몸에 풍류소리가 젖어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이 꿈을 이상히 여긴 베드로는 한 교우에게『아마 이것은 내가 치명할 징조의 꿈이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과연 수일후 베드로는 잡히게 된 것이다.
포청에 이르러 우선 베드로에게 주리를 틀었으나 베드로의 안색은 변함이 없을뿐더러 도리어 포장에게 말로 강론했다. 포장이『만일 네가 말로 배교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커다란 글자 하나를 써줄 것이니 거기에 점을 찍거나 아니면 침을 뱉는다면 그것으로 배교하는 표시로 알고 놓아주겠다』고 제안하자 베드로는『만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고 일축해 버렸다. 또 한번은 홍몽둥이로 베드로의 엉덩이를 마구 내려치면서『네가 만일 아프다고 소리를 낸다면 배교하는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하였다. 「기해일기」의 저자는『곤장의 아픔이 오죽하였으리오마는 참고 견디어 마치 고양처럼 조그마한 신음소리도 내지 아니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밤낮으로 괴롭혔지만 결국 소용없음을 알고 베드로를 형조로 이송했다.
형조에서 이 베드로 남매가 받은 심문과 고문에 관하여 우리는 베드로 자신이 남겨놓은 귀중한 비망기에서 상세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추려보면 이러하다. 『사교는 부모의 은덕을 배반하고 나라에서 엄금하는 것인데도 너는 왜 그것을 신봉하느냐?』『천주교는 결코 사교가 아닙니다』『너는 한문을 아느냐?』『모릅니다』『한문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 교를 배울 수 있었느냐?』『이 교를 배우기 위해서는 조선말로 번역된 책이 있으므로 한문은 몰라도 관계없습니다』다음 베드로는 제사의 불가함과 천주교인이 역적이 아닌 연유를 명백히 변호하였다. 『네 말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나라에서 그것을 금하고 거역하는 자를 사형에 처하고 있다』고 하며 남매를 마구 매질하게 했다. 『그래도 마음을 돌리지 않겠느냐? 매가 아프지 않으냐?』『아프지 않을리가 있겠습니까』『그러면 마음을 돌려라』『할 수 없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천주교책을 보았을 때 마음을 돌렸으니 이제 다시 돌릴수 없습니다』형리들은 쉬지않고 매질하였고 남매도 쉬지않고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 마침내 베드로에게 소위 사학 죄인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천주교가 정교이고 사교가 될수 없다고 항의하는 베드로에게 재판관은 억지로 다짐을 받았다.
기력이 점차 쇠약해져서 병이 들게 되니 이제 임종이 가까왔음을 깨닫고 베드로는 한숨지으며『나는 칼 아래 죽기가 소원이었다. 하지만 만사가 주님의 명령이 아닌것이 없다』고 말했다. 드디어 무술년(1838) 10월 8일(11ㆍ24) 그의 영혼을 평안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주님께 바치니 때에 나이 36세였다. 이렇게 그는 기해박해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4년이란 긴세월 동안 옥에 있으면서 베드로는 고통과 병고를 체념으로 참아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재계함으로써 그의 영혼을 부화시켰다. 그의 이와 같이 정직하고 양선한 표양은 옥졸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였으며 죄수 한 사람을 개종케하여 영세시키기에 이르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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