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얘기의 줄거리를 간추려본다면 기해년 3월 5일(4ㆍ18) 배교하지 않는 교우는 다 사형에 처하라는 박해령이 선포되었고 이 박해령이 내린후 처음으로 사형이 집행된 것은 4월 12일(5ㆍ24) 서소문 밖에서였다. 이때 남 다미아노 이 아오스딩 권 베드로 박 루시아 박 안나 이 아가다 김 막달레나 한 발바라 김 아가다 이렇게 모두 9명이 순교하였고 이들은 다 복자가 되었다. 지금가지 이 아홉분의 전기가 모두 소개되었다. 그 중 이 아가다에 이어 이미 전년에 옥사한 이 베드로를 소개한 것은 그가 바로 아가다의 동생이 되는 인연에서였다. 4월 12일 첫번째 처형에 이어 두번째 사형이 집행된 것은 거의 두달후인 6월 10일(7ㆍ20)이었고 이때에도 8명이 참수치명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전기를 고찰하기에 앞서서 비록 그들처럼 화려한 순교는 차지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순교를 감옥에서 완성한 정 쁘로따시오 장 요셉 이 발바라 김 발바라 등 4명의 복자를 먼저 소개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4월중에 모두 옥사했기 때문이다. 정국보는 원래 송도의 이름있는 양반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조부가 벼슬을 하다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자 이때 그의 부친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저 상민으로 자처하고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에 와서 국보는 계공감(이조때 토목과 궁서을 맡아보던 관청)에서 일을 했다. 비록 태생이 외인이었으나 온화하고 선량하며 겸허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나이 30세가 넘어서야 처음으로 성교도리를 듣고 입교하였으며 수년후에는 쁘로따시오란 본명으로 영세할 수 있었다.
쁘로따시오는 집이 극히 가난한데다 병마저 늘 몸에서 떠날줄을 몰랐지만 빈궁과 병고를 감수 인내하여 한번도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인적이 없다. 또한 슬하의 14남매를 모두 잃었으나 그러한 충격마저도 놀라운 체념으로 참아냈다고 한다. 유 빠치피꼬 신부가 흥살문 거리에 집 한채를 사서 쁘로따시오로 하여금 집을 관리케하는 한편 시골에서 성사를 받으러 서울로 오는 문밖 교우들을 이 집에서 대접케 하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여 교우들에 관한 일이라면 어떠한 위험이나 수고도 사양치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 모든 교우들의 귀감이 되었다.
기해년 3월 아내와 한가지로 잡혀 포도청에 갇혔다. 쁘로따시오는 포청 심문에서는 흑형하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형조에서는 심한 고문과 유혹에 못이겨 그만 배교하므로 석방되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미구에 그는 티푸스에 걸렸다.
이때 그는 배교한 죄에 대하여 심한 가책을 느끼고 날마다 침식을 잃고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 한 열심한 교우가 찾아와 권면하니 용기를 얻고 자수할 결심을 했다. 곧 형조로 달려가서 재판관을 찾으니 하인들이 그 연고를 물었다. 배교한 말을 취소하고 죽기가 원이라고 하니 하인들이 도리어 그를 미친사람으로 취급하고 들여보내 주질 않았다.
다음날 쁘로따시오는 또 형조로 가서 판서를 만나려 했으나 역시 거절당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3번째로 시도한 것은 3월 그믐날(5ㆍ12)이었다. 그날은 그가 받은 상처에다 본래의 신병이 도져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어서 가마에 실려서 갔다. 역시 하인들이 문을 막고 들여보내주지 않으므로 쁘로따시오는 형조 판서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형조 판서가 나오자 그의 앞에 엎드려 배교한 전후 사연을 명백히 말하고 배교한 죄인으로서 죽여달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형조 판서는『소용없는 말이니 비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쁘로따시오는 더욱 답답하고 안타까와진 나머지 큰소리로 죽여주기를 애원하니 판서도 하는수 없이 그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감옥에 있는 교우들의 축하를 받으며 하옥되는 쁘로따시오의 마음은 성스러운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곧 포청으로 옮겨져서 거기서 쁘로따시오는 또 한번 심문을 받고 곤장 25도를 맞은 다음 다시 하옥되었다.
이미 티푸스로 기력이 쇠진한데다 이렇게 또 가옥한 형벌을 받게되니 옥으로 돌아왔을때 쁘로따시오는 거의 죽은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새벽 즉 4월 9일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기해일기에 의하면 그가 숨을 거둔것이 바로 그날밤 즉 4월 8일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정 쁘로따시오는 박해령이 선포된 후로는 첫째번 희생자이다.
옥에서의 순교는 그가 배교로 교회를 불명예가 되고 교우들에게 나쁜 표양을 주었던 그만큼 더욱 교회에 명예가 되고 교우들에게는 비록 한번 허약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용감히 참회할 수 있는 모범이 되었다.
79위 복자 중에는 정 쁘로따시오 외에도 이미 기해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옥사한 이 베드로를 위시하여 무려 10명이나 옥사했다. 비록 그들의 죽음이 겉으로는 다른 순교복자들처럼 영광스러운 것은 아니었을 망정 그들의 이름은 간선자 명부에 기입되어 오늘에 이르러 천주교회사 안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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