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4월 정 쁘로따시오에 이어 이번엔 김 발바라와 이 발바라가 같은날 옥사했다. 기해일기는『옥에서 교하여 죽고 장하에 죽고 병들어 죽은자 합 60여 인이나 된다』고 함으로써 옥사한 이들 가운데 병들어 죽은 이가 적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대개가 염병에 걸려 죽어갔으니 사실 좁은 감방에다 너무 많은 사람을 가두고 또 너무 불결하게 하여 두기 때문에 이러한 열병이 발생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병인년의 순교자 안(다불뤼) 주교도 기해박해 당시의 감옥에서 염병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 교우들은 옥중에 어떻게나 빽빽히 갇히었던지 잘 때에 자리도 펴지못할 지경이었다.
그들이 한결같이 말한것은 이 참혹한 옥중의 괴로움에 비하면 고문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고름으로 자리는 곧 썩어버려 견딜 수 없는 악취를 풍기며 염병이 발생하여 며칠동안에 여러사람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옥고중에서 염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곧 기아요 갈증이었다. 다른 형벌을 받으면서는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이들도 이 주림과 목마름에는 넘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하루에 두번씩 주먹만한 조밥 한공기밖에는 얻어먹지 못하므로 이들은 나중에는 자기들이 누워 자는 더러운 벼집자리를 뜯어먹고 심지어는 말하기조차 징그러운 일이나 옥안에 들썩들썩거리는 이를 잡아 먹기까지 하였다.
염병과 기아와 갈증이 옥중의 교우들의 고통을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만든 반면에 설상가상으로 이로 인한 옥사마저 영광된 순교로 간주될수 없는것이 아닌가 하여 당시 순교를 열망하는 교우들의 양심을 불안케하였다.
그래서 나(모방) 신부는 자수하는 도상에서 모든 교우들에게 효유하는 편지를 통해 이 문제에 관하여 교우들의 양심에 안정을 주고자 하였다. 『비록 칼 아래 죽지 아니하고 옥에서 죽을지라도 일정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고 칼 아래 치명한 사람같이 일정 영복을 얻을것이니 마땅히 실망치말고 주를 배반치 말지어다』본성이 솔직하고 굳세고 정직한 김 발바라는「진주 엄마」라고 널리 불리었는데 시골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비록 부모와 동생들이 성교도리를 알고 있었지만 독실하게 믿고있지는 않았다.
발바라는 13세에 서울 황 마리아 교우집에 와서 하녀로 일하면서 입교하게 되었다. 본시 수정 할 원의가 있었으나 하루는 부친이 서울로 찾아와서 집주인과 딸을 속여 말하기를『혼인할 마땅한 데가 있어서 허락하였으니 예비하라』고 하자 발바라는『수정 하기가 원입니다』고 거절하였다. 부친이『혼인하여 부부 한가지로 봉행하는데 방해가 없을 것이고 또한 너 자신이나 네 부모와 동생을 위해서도 유익할 것이니 고집하지 말라』이렇게 만단으로 달램으로 부득이 결혼에 동의하였다. 알고보니 남편이 외인이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동거 15년동안 발바라는 남편을 예로써 섬기며 입교를 권면해 마지않았는데 그는 고집불통이었다. 자녀 여럿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의 화해는 날이갈수록 어려워지니 그간 겪어야했던 고초는 이루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은 남편은 귀화하지 않았고 말년에 이르고 빌어먹다가 객사하게 되었다. 과부가 된 후로 발바라는 딸을 데리고 기구와 선행에 전념할 수 있었고 선교 신부가 입국하여 성사를 받게된 후부터는 그 어느때보다도 일층 독실하게 수계하게 되었다.
기해 오월 집주인과 같이 잡혀 포청에 갇혔다. 『배주하라 일당을 대라』하며 주리를 틀리고 또 온갖 혹독한 형벌로 문초를 당하니 팔이 부러지고 전신을 쓰지못할 지경이 되었으나 종시 그 뜻을 굽힐줄을 몰랐다. 형조로 이송된 후 고문에 주림과 목마름이 겹쳤고 드디어는 염병에 걸려 옥에 있은지 3개월 이래 4월 15일(5ㆍ27) 35세를 일기로 옥에서 선종하였다.
같은날 15세의 어린 동정녀 이 발바라도 그의 순결한 일생을 희생하였다. 발바라는 바로 일가 5명의 순교자를 낸 경기 봉천 이 발바라와 막달레나의 조카이다. 이해 오월 두 이모 등 6명이 자수한 후 얼마 안되어 발바라도 잡히었을 것이다. 원래 부모 형제가 다 교우인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 청파에서 살았으나 조실부모하자 아주 가난하고 의탁할 때가 없는 어린 조카를 서울의 두 이모가 맡아키웠다. 발바라의 천성이 온순하고 아주 다정스러웠을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열심하여 가난을 참는 덕이 비범하였다고 한다.
포청과 형조의 무수한 형벌 밑에서도 어린나이와 가냘픈 여성에게서 볼수 없는 뛰어난 용적을 보였다. 형관이 백단으로 꼬이고 달래보았지만 종시 발바라에게서 한마디 허약을 보이는 말이나 표시도 얻어내지 못하니 모두가『그 나이 어린 것이 요물이다』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형조에서 어린나이 때문에 다시 포청으로 이송된 발바라는 같은 감옥의 어린이들과 서로 격려하며 날을 보내다가 기갈이 심하고 또 염병이 겹쳐 고통으로 앓기를 1개월여 마침내 안연히 포청에서 숨을 거두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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