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글자가 잘못 씌어지지는 않았을까 하고 두 세번 읽었다. 그리고는 네 겹으로 접어서 품에 넣었다. 가슴이 몹시 뛰었다. 잠시 올 턱도 없었다. 뜬눈으로 돌아가는 시계바늘만 쳐다보며 밤을 세울 작정이었다. 내일 아침 명구가 들어오면 쪽지를 토마스에게 전해달라고 해야지.
그녀의 눈엔 쪽지를 받고 당황하는 토마스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어느 외국영화에서 본 애인과의 탈출장면이 아주 실감나게 떠올랐다. 그러자 더욱 가슴이 뛰고 안절부절해졌다.
그녀는 누워있을 수가 없어졌다. 도무지 가슴이 파닥거려서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챙겨야할게 한두가지가 아닌것 같았다. 그녀는 살그머니 옷장문을 열었다. 여러가지 옷들 중에서 가장 부피가 적은 옷만으로 골랐다. 얇은 모직으로 된 투피스와 판타롱 홈드레스 그녀는 세 벌쯤 꺼낸 옷 중에서 토마스가 예쁘게 보아줄 옷이 아닌 것은 도로 집어넣으려고 했다. 준비해올 가방이 얼마나 큰것인지 알 수도 없는일. 하여간 겨울옷은 꼭 챙겨가야 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그때가서 적당히 한 벌 맞춰입으면 될터였다.
그녀는 꺼낸 겨울옷 세 벌을 부피가 적게끔 눌러 포겠다. 이만하면 옷은 챙긴셈이다. 다음은 무엇을 챙겨야 할까? 그렇지 화장품이다. 이것도 옷에 뒤지지 않게 필수품인 것이다.
그녀는 화장대 위에 정돈되어 있는 크림 메니큐어 로숀 류우즈 등등 골라 내어 타올에 쌌다. 하마터먼 잊을뻔한 손거울과 빗도 챙겨쌌다.
옆 방에는 코고는 소리밖에 나지않는다. 요행이도 성모님은 기회를 주신 모양이다.
그녀는 또 챙겨야 할게 없나 하고 방안을 휘둘러봤다. 벽에 걸려있는 아버지의 외투가 보였다. 아버지는 외투를 세탁소에 맡겨달라고 시켰는데 그녀는 미처 외투를 갖다주지 못하고 자기방에 걸어 두었던 것이다. 그녀는 외투를 보자 단번에 초라한 옷차림의 토마스가 입기에 꼭 안성맞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비명이라도 지를만큼 기뻤다.
외투를 그녀는 조심스럽게 챙겼다. 이러는 동안 왠만큼의 시간은 흘렀다. 시계는 두시를 알렸다.
그녀는 이제 마지막으로 한가지 남은 일에 손댔다. 돈이었다. 낮에 토마스에게 보인 돈을 그녀는 이제 모조리 챙기게 되었다. 단 한푼도 남기지 않고 챙겨야지.
그녀는 잠시 옆방의 동태를 살폈다. 부모님은 딸이 김 계장한테 시집갈 것을 명심했으리라 생각했겠지, 흥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생각을.
그녀는 옷장 서랍을 열었다. 돈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냐, 이 돈은 누가 뭐래도 가져가야 했다. 부모님은 딸을 시집보낼때 지참금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 돈은 그녀 스스로 벌어 모은 것이며, 어차피 챙겨갈 돈이었다. 그녀는 이 돈을 모으면서 온갖 희망에 부풀었던 것이다. 군청에서 일한 보람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매달 월급에서 삼분의 이를 모아둔것.
그녀는 돈에 입맞추고 마치 구세주처럼 소중히 외투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또 뭐가 없을까?
그녀는 혹시 중요한 것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싶어졌다.
모든 중요한 것들은 다 챙긴것 같았다. 그녀는 챙긴것들을 이불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벽에 걸친 성모님의 상본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자애로운 성모님 저를 도와주세요. 토마스와 무사히 집을 빠져나가도록 보살펴주십시오. 만약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한없이 고맙겠습니다. 성모님 제발 제발 저의 애원을 물리치지 말아주세요. 토마스는 저를 사랑해요. 저도 토마스를 사랑합니다. 성모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많은고난을 선물로 주시지 않으세요. 저의 부모님들은 비록 저의 소행을 욕하시겠지만 성모님 저의 살 길은 이 길 뿐입니다』
그녀는 혀가 닳도록 기도했다. 가슴에서 불이 일어나도록 그녀는 성모님을 불렀다.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서도 빌었으며 무엇보다도 이 일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시계는 세시를 알렸다.
그녀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혹시 명구가 결근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였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만약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는 토마스의 집을 몰랐다. 성당 부근이라는 것 밖에는 몰랐다. 그리고 알았다손쳐도 당돌하게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할 수가 있겠는가. 첫째 토마스가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처음보다 결과는 못한 것이 되고만다.
그녀는 수녀원에 잠시 피신할까도 싶어졌다. 수녀님들은 아마 이 일을 적극 협조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꺼리가 없지않다. 회장인 아버님이 온통 소란을 피운다면 수녀님들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을까? 성직자들은 온전한 마음을 빼고는 성직에 임할 수가 없는것이다. 수녀원에도 신세 끼칠수도 없는것이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아침에 집안식구 중 누가 방에 들어오면 큰일이다. 방의 어수선함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리라 그렇게 되니까 쪽지를 다시 고쳐쓰자 토마스를 집으로 오라고 할게 아니라 어디 다른 장소로 택해서 그곳으로 오라고 하는게 좋을 것 같다.
그녀는 품에서 쪽지를 꺼냈다. 글을 고치려고 다시 읽어보았다. 이대로가 좋은데-. 그녀는 더 명확하고 안전한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봤다. 만약 장소를 다른곳으로 정했다고 쳐보자, 이 쪽지를 받을 토마스가 혹시 집에 없을 경우 괜스레 혼자 그 장소에 나가서 서성거리고 그러다가는 별수없이 집에 돌아오고 말것이다. 그러니까 이대로 전하는길 밖에 없다. 성모님께서 이 일을 옹호하신다면 틀림없이 이대로 이뤄질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