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신부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동창신부로부터 들었을때, 저는 이제 신부님께 돌이킬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울 성모병원에 입원해 계실때 서신으로 병문안을 사뢴뒤 지금까지 신부님을 찾아 뵙겠다는 계획을 미루어 왔더니 이제는 살아계신 모습은 커녕 서신으로도 안부를 물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무어라고 사죄해야 하올지요? 저는 죄라는 것을, 은혜를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신부님의 크신 은혜를 조금도 갚아드리지 못하고 신부님을 다른 세상으로 떠나 보냈으니 그곳에서 신부님을 뵙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신부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린 저의 서신에 신부님께서는 생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답장을 해주셨습니다. 곧 회복되어 신학교에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며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학생들과 일하시겠다는 신부님의 답장을 읽고 저는 슬픈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당신 병환이 장암(腸癌)이라는 사실을 아신다고 했는데 회복되실 것으로 믿고 미래를 계획하신다니 마음이 슬퍼지더군요. 신부님의 말씀대로 신학교에 다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부님의 그 사도적 열성을 하느님께서 한 시련으로 삼으시는 것처럼 생각되어 슬펏던 것입니다. 인간은 계획을 세우고 하느님은 이를 펴신다 하십니다. 계획을 세우는것 조차 하느님께 미룰 수 없으셨던가요?
신부님,
신부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대구에 내려갔더니 여러 신부님들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돌아가실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음이 확실한데 신부님께서 고통중에 누워계시면서도 회복되면 이런일을 하겠다. 저런일도 하겠다고 하시는데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고 말입니다. 어느 동료신부님께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으셨지요?
『최 신부, 우리는 이미 그때(해방후 이북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어 성직자들이 할 수 없이 38선을 넘어 월남하지 않을 수 없었을때) 죽었던거나 다름없어. 지금까지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큰 은혜야. 미련을 가져서는 안돼. 최 신부가 당하는 병고를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이 남았을뿐이야. 지금 이렇게 어려운 세대에 최 신부의 병고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 보라고, 세계의 평화는 극도의 위협을 받고 있고 나라의 정세는 혼란의 극에 달해있지 않은가? 최 신부, 고통을 세계와 조국의 평화를 위해서 잘 받아들여야해 그렇게 할수 있겠지?』
신부님은 동료신부님의 축복속에서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모든 고통을 잘 참아 받으셨다고 합니다. 고통의 신비란 결국 우리의 고통이 주님이 고통이 되고 구원의 고통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부님,
신부님은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신부님의 태도가 무척 어리석게 생각되더군요. 그런데 신부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본당에 돌아와서 어떤 나이 어린 소녀를 만나보고 나서는 신부님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살하려고 결심했는데 마지막으로 저를 만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신부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삶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으신 신부님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생각할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죽는순간까지 죽음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는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이 계획하신 것들을 살아있는 저희들이 해드리겠습니다. 기차안에서 만난 어느 신학생은 신부님이 그동안 작곡해 놓으신 것들을 정리해드리고 싶어하더군요. 그런 기회를 마련해주십시오. 신부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펴드리겠습니다. 신부님의 장례행렬에서 저는 아름답게 피어나는 수련꽃들을 보았습니다. 신부님께서 저 세상에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사는 저희들을 항상 지켜봐주십시오. 하느님이 주신 이 귀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신부님, 이제 계획하시는 일은 그만두시고 주님안에 편히 쉬십시오. 아멘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