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의 박해는 4월말부터 그 세찬 기세가 점차 누그러져서 앞으로 약 한달 동안 약간의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이 무렵 가능한 한 천주교인 편에 들어서 그들의 목숨을 아껴오던 형조판서 조병현이 그의 보좌관 참판과 더불어 무죄한 교우들을 학살한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사임함에 따라 그들의 후임으로 판서에는 홍명주가 그리고 참판에는 임성고가 각각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교우들 주장에 의하면 새로 임명된 사람들도 천주교인에 대하여 비록 겉으로 드러내기는 꺼렸다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하등의 개인적 적의를 품은바 없었으며 특히 임성고는 병오년(1846)박 해때 김대건 신부에 대하여 아주 관대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김 신부 자신도 그가 내심으로는 교우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일반 국민들은 천주교에 대한 공연한 중상과 비방에 자극을 받아 제나름대로 천주교인의 처단 방법을 주장했는데 그 중에는 공공연한 처형을 요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포청 형리에게 맡겨 장하에 죽게 버려두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고 차라리 굶주리고 병들어 옥에서 죽게 내버려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같이 분분한 여론에 대하여 조정에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므로 한 때 교우들의 문제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박해자의 손길이 멈칫하게 되니 교우들도 잠시 숨을 돌릴수 있었고 박해에 대비하여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러 급히 귀경했던 범 주교도 이제는 더 이상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끝에 수원 해변가에 교우들이 주선한 은신처를 향해 4월 22일(6ㆍ3) 배편으로 서울을 떠났다.
범 주교가 피신한지 약 한 달이 지나서 조정에서는 세도다툼에서 돌연 일종의 궁중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로인해 거의 정권이 조병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헌종의 외삼촌이고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로서 안동 김씨와 세력다툼을 했다. 또한 정권을 행사하는데 있어서도 실지로 영의정같은 높은 자리에서 한 것이 아니라 금형대장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풍양 조씨 중에서도 가장 천주교를 미워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만큼 그의 등장후 얼마안되어 교우들을 색출하기 위한 새로운 법령이 선포된 것은 과히 놀라운 일이 아니다.
5월 25일(7ㆍ5) 교우들을 정찰하는데 포장의 소홀했음을 책하는 동시에 이후 체포에 일층 열과 성을 다하지않는 한 중형을 면하지 못할것이라는 골자의 새로운 칙령이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반포되었다. 이것이 반포되기까지 경연에서 대비와 우의정 이지윤 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요새 형조에서 징계하는 사학은 어떠한가? 이 무리를 빨리 없애버리지 않으면 그 퍼져가는 걱정이 심상한 것이 아니니 어찌 일시인들 소홀히 하겠는가』
『당초 듣기엔 대단하더니 금령을 내린후에는 아직도 체포된 자가 없음은 저들이 두려워서 그런것 같습니다』
『비록 체포되어 형을 받은 자도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든 하물며 체포되기 전에 어찌 법을 무서워해서 자참하기를 바라겠는가』『수십년 전에는 인심이 다 놀라고 분해서 토사하는 법이 있는줄 알더니 지금은 그렇치가 않아 보통으로 여기니 이것이 가장 민망한 일입니다』
『집의 물건을 수색하여 약탈하지 말라한 후 부터 포교배가 다시 체포한 자가 없다하니 그것은 포장이 전혀 착념치 않은 때문이다.
마땅히 중죄를 받아야 할 것이나 이후에도 일향으로 해이하면 엄벌할 것이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걱정이 아니라 조정 전체가 한가지로 걱정할 바이니 머지않아 조정의 사부간에 침염될 자가 없을줄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대신은 나간후에 포장을 불러 더욱 신분해야할 것이다』
이상의 대화에서 우리는 교회측 자료의『조정에서 배교자들의 가산을 반환하도록 지시한 이래 포졸들이 교우를 잡지 않는다고 하니 이전처럼 마음대로 약탈하게 허락해 달라는 대신 이지윤의 청을 대비가 물리쳤다』고 한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법이 나온후에도 수색에 별 진전이 없었고 5가작 통법의 실행도 서울에서마저 유명무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인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알려진 대비의 오빠 황산 김유근의 사망과 유다스 김여상의 배신으로 뜻밖의 큰효과를 내게되었다. 김여상은 신자의 가면을 쓰고 모임에는 언제나 제일 먼저 나타나 교묘하게 교우들의 신뢰를 얻음으로써 포장에게 가장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고 이 정보로 6월 7일(7월 17) 유진길에 이어 조신철 정하상 등 교회의 주요인물들이 속속 잡히게 되었다. 유진길의 체포령은 이미 내려있었으나 당상 역관이란 정삼품의 높은자리에다 황산과의 친분도 알려져 있어서 감히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차에 황산이 병사하자 즉시 체포되었다. 황산이 유진길로부터 대세를 받았다는 것이 교회측의 전승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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