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쪽지를 도로 품에 넣었다.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녀는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의식했다.
시간은 네시를 알렸다. 멀리 닭의 홰치는 소리가 여운처럼 들려왔다. 앞으로 두시간 후에는 날이 샐 것이고 또 두시간 후에는 직공들이 출근할 것이다.
그녀는 얼굴이 푸석푸석 한것같았다. 잠을 못자서 그런지 전신에 긴장이 풀리고 하품이 연신 나왔다. 그녀는 하품소리를 죽이기위해 손바닥으로 그때 그때마다 입을 눌렸다.
그녀는 다시 재검토해볼 필요를 느꼈다. 식구들이 방에 들어올 경우 눈치챌수 없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이불이 불룩해져 있으면 안될테고 그렇다고 옷장속에 집어넣어도 안될것이다.
그렇구나.
그녀는 무릎을 탁쳤다.
문을 안으로 잠그고 가만있는 것이다.
식구중 누구든 들어오려 할때는 속옷을 갈아 입는다든가 그때그때의 상황을 봐서 적당히 꾸며대야지.
사실상 그녀가 가출을 하리라고는 누가 꿈엔들 알 수 있으랴.
그녀는 모든일이 원만히 이루어질것 같아서 기뻤다. 춤을 추고 싶었다. 이 모든 지혜가 어디서 나올텐가.
오, 성모 마리아여.
시간은 다섯시를 알렸다. 여섯시가 되면 부모님들은 잠을 깰 것이다. 동생들은 아침 공부를 할것이고 나는?
그녀는 피씩 웃음이 나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몹시 초췌해 보였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빰을 부드럽게 맛사지했다.
피부가 다시 윤택해지고 아무튼 토마스의 눈에 아주 이쁘게 보여야지 토마스는 나의 계획 같은 것은 모르고 있을꺼야.
그녀는 통쾌한 기분조차 들었다. 용기를 못내어서 항상 먼 발치에서만 쩔쩔매는 토마스. 그 토마스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이 눈부신 계획.
그녀는 서른살이나 되는 김 계장은 천만금을 준다해도 싫었다. 자기 숙부를 자랑처럼 떠벌리고 주위사람들을 자기 수중에 끌어들이려고 하는 파렴치한을 어떻게 남편으로 맞을텐가. 도대체 부모님들이란 좀 편안하게 살고 싶어하는 그것에만 집착하고 있잖은가.
틀림없이 김 계장이란 작자는 아버님께 한자리 운운했을 테고 아버지는 감격해서 악수를 하려고 덤볐을것이다.
그녀는 그 같은 광경을 떠올리고는 구역질 같은걸 울컥느꼈다. 절대로 그런 치욕적인 일은 있을수가 없는것이다. 시간은 느리고도 빨랐다. 여섯점을 치고있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창문은 새벽의 환한빛으로 물들었다. 더없이 맑고 고운 새벽빛.
그녀는 방문고리를 잠그고 비로소 마음을 가다 듬었다. 이제부터 적의 내습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외에는 일단 적이라고 단정지었다. 이 일의 성취를 위해서는 식구들도 적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옆방에서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크렁크렁났다. 잠을 깬 모양이다. 혹시 간밤에 딸의 가출꿈이라도 꿨으면 어떡하나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옆 방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 소리가 마치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그녀는 문득 아침식사를 떠올렸다. 과연 오늘아침은 누가 밥을 지을것인가. 어머님이 아무소리없이 부엌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나를 불러댈 것인가. 아침식사는 일곱시에 하므로 밥은 여섯시에 짓는게 규칙처럼 되어있었다.
그녀는 다시 성모님께 기도하지 않을수 없었다.
『성모님 도와주시는 김에 끝까지 좀 도와주세요. 오늘만 무난히 지나면 내일부터는 몇천만번이라도 아침밥을 짓겠습니다. 제발 어머님이 아무 말없이 밥을 짓게 해주세요』
그녀의 기도가 마침 끝나는데
『젬마야 오늘만은 내가 밥을 지을 테니까 넌 푹 좀 자거라』
어머님이 문밖에서 이렇게 말했다.
젬마는 어린애처럼 두팔을 벌리고 너무 기뻐서 성모님의 상본을 껴안았다.
그녀는 무수히 상본에 입맞추며 시간 흐르기만 바랬다.
부엌에서 쌀 씻는 소리가 나고 아버님의 음음대는 소리가 이따금씩 났다.
간밤에 김 계장한테 시집가겠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 모양이다. 허긴 믿을 수밖에 없는분들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꽤나 당황하겠지.
그녀는 이제 준비단계를 끝냈으므로 출발단계를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토마스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서울로 갈것인가 부산으로 갈것인가, 가령 서울로 간다면 버스를 탈것인가 열차를 탈것인가.
이 문제는 토마스한테 의논해보는게 나을꺼야. 토마스는 남자니까 재료만 가져다주면 제작은 능력껏 해낼 수 있겠지. 어쩌면 토마스의 친척집이 서울이나 부산쯤에 있을지도 모를꺼야. 없다해도 그까짓게 문제될게 뭐 있겠나.
그녀는 여관이나 셋방쯤은 문제없이 구할 수 있었다. 돈은 충분히 있으니까.
시간은 일곱시.
『젬마야, 나와서 같이 식사해』
어머님이 불렀다.
그녀는 어머님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휴전선을 그었다.
『지금은 밥 생각 없어요. 나중에 제가 챙겨먹을 테니까 먼저 잡수세요』
『응 그래라』
오늘은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겠다는 것이다.
옆방에서는 숟가락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십분쯤 계속되었다.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어서 여덟시, 어서 여덟시 … 』
시계바늘은 절대로 가불이 없다. 그리고 외상도 없다. 남이야 뭐라든 째깍째깍 거릴 뿐이다.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조차 문득 들었다.
시계 바늘을 여덟시에 밀어부쳐도 땅덩어리가 그만큼 움직여 준다면.
옆방에는 식사가 끝난 모양이다. 수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덤추었다.
어머님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누나를 귀찮게 하지 말아라. 누나는 며칠후에 시집갈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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