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3월 5일 이른바「사학토치령」의 공포와 함께 박해가 정식으로 시작하자 전기한바와 같이 맨처음으로 이 아오스딩 남 다미아노 천 베드로 3명의 남교우와 동시에 6명의 여교우가 4월 12일 서울 서소문밖에서 참수치명을 당했다. 그 후 박해는 뜻밖에도 주춤하였고 이렇게 한때 중단된 시기를 이용하여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러 상경했던 범 주교도 수원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돌연 5월 27일 그간 포장들이 정찰에 태만하였음을 책하고 앞으로 철저한 수색을 중형으로 위협하는 새로운 훈령이 나왔다.
때를 같이한 유다스 김 여상의 상세하고도 정확한 정보제공에 힘입어 유진길 조신철 정하상 같은 교회의 주요인물들이 속속 검거되었다.
일로 강경해가는 정부의 대 천주교 조치는 드디어 6월 10일(7ㆍ20) 다시금 사형집행을 재가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이광렬 김 안나 김 루시아 이 막달레나 이 데레사 원 마리아 김 말따 김 로사 등 8명의 교우가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이들은 모두가 1925년 복자위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했다.
이 용감한 대열의 두목인 이광렬은 그보다 먼저 순교한 바로 이광헌 회장의 아우이시다.
광렬은 형과 함께 참수될 것이었지만 원래 우리나라 법에 형제를 한 때 죽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의 사형이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광렬」은 관변측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고 교회측 기록인 「기해일기」에는 그의 이름이 「경삼」이로 되어있다. 광주 이씨의 양반가문에 속해 있었고 신앙면에서는 4명의 복자를 배출한 이광렬 회장 집안의 한 사람이었다. 본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난 그가 천주교를 믿게된 것은 중년에 이르러서이고 형의 입교가 그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 광렬은 총각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형이 몹시 가난하게 살고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 아가다는 이 집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이렇게 말한다. 『나는 10여세에 가끔 외조모를 따라 이 회장집에 갔었다. 이 집 식구들은 아주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 어려움을 잘 참았다. 세상 것을 생각치않고 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우리 집에서 두부장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외조모는 나를 시켜 비지를 갖다주게 하였다』뿐만 아니라 당시의 교우들은 거처할 곳 조차 없는 처지를 가련히 여겨 추렴하여 서소문밖「고마창골」에 기와집 한채를 사주어 이 회장으로 하여금 거처케 하였는데 이 집은 동시에 공소집으로도 쓰였다.
그러나 광렬은 형과 같이 거처하지 않았고 형의 집에서 멀지않은 이뭇골의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따로 살았다. 그리고 김 안나란 여교우와 같이 분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열심히 벌었다. 그러면서도 교우의 본분을 잊지않고 다했으므로 모든 교우들이 그의 착한 표양과 덕행을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그는 아주 강직하고 열성있고 열심이 깊어서 입교한지 수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벌써 북경을 왕래하여 선교사를 맞아드리는 중책을 맡아보는 지도층 교우측에 끼게되었다. 그는 북경에 두 차례나 왕복하였고 북경에서 세자 요한의 본명을 받고 세를 받았다. 북경의 수사와 신부들은 이 요한의 충직한 모양과 열심의 간절함을 보고 경탄하였다고 한다. 이 요한이 북경에서 성사를 받고 돌아온 후로는 종전보다 열심이 배가하여 육식을 일체 끊었고 또한 결혼할 생각을 단념하고 세상의 모든희 망과 쾌락을 버리고 독신으로 지낼 결심을 하게되었다.
특히 묵상과 관상을 통한 이 요한의 정신수렴은 비상한 것이어서 주님과의 끊임없는 긴밀한 결합을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외형에도 드러나 과연 요한에게서 성사의 특별하고 신기한 효험을 능히 체험할 수 있다고 사람마다 탄복했다는 것이다.
2월 28일(4ㆍ8) 밤중에 먼저 남 다미아노 회장의 집을 습격하여 일가를 체포한 포졸들은 이어 이광렬 회장집으로 달려와서 아오스딩과 그의 처 권 발바라 딸 아가다와 두 어린아들 등 일가 다섯명을 모두 체포했다. 이때 이 회장의 80세의 노모도 함께 붙잡혔다. 따라서 어머니를 모시고있던 이 요한도 어머니와 같이 잡혀왔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항시 순교할 원의를 품고있던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형과 한가지로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형과 한가지로 굳세게 머물렀다. 재판관은 먼저 형을 향하여 『한마디 배교한다는 말만 한다면 너뿐만아니라 네 처와 동생과 자녀를 다 놓아주겠다. 또한 네 가산도 다 돌려주겠다』고 달래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음 동생 요한에게로 와서 여러 차례 주리와 곤장으로 배교하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조금도 굴복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언제까지고 그것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단언하였다.
기해일기는 요한의 순교를『결안하고 옥에 있은지 5색만에 육월초 열흘 성모성의 첨례후 4일에 8인이 한가지로 참수치명하니 년이 45세요 때는 천주강생후 1839년이러라』고 증언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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