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회에 소개한 이광렬과 한가지로 참수치명한 이는 모두가 8명, 그리고 이광렬을 제외하면 모두가 여교우였다. 그런데 이 7명의 여교우 중에서도 이 데레사 김 루시아 김 말다 이 막달레나 4명은 2월 28일(4ㆍ11)포졸앞에 자수하기까지 서울「학다리」에 있는 이 막달레나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이 막달레나가 처녀의 몸으로 고향인 서울서 멀지않은 봉천 마을을 떠나 서울로 피신해와 살게된 경위는 이러하다. 막달레나가 17세가 되던 해에 부친이 그들 외인과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본시 수정할 마음을 먹고있던 막달레나는 결혼을 피할 계교를 생각하고 있었다. 11월 16일, 이날은 막달레나의 생일 전날이었다. 그는 궁여지책에서 가출할 결심을 하였다. 집안사람 아무도 모르게 헌옷을 갈아입고 입었던 옷을 벗어 피를 묻혀 범한테 물려간 것처럼 믿겠끔 숲속에 버리고 곧장 서울로 피신했다.
이튿날 딸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던 모친은 돌아오지 않는 딸을 찾아나섰다. 숲속에서 피가묻은 딸의 옷을 발견하자 딸이 범에게 잡혀 먹혔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딸이 일부러 한 짓임을 알게되었다. 봉천 이씨 집에서 제일 먼저 입교한 사람은 막달레나의 고모 이 데레사였다.
외인시절에 결혼한 데레사는 20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같은 동리의 한 여교우가 그를 불쌍히 여겨 전교하였다. 데레사는 자신이 입교할 뿐만아니라 집안식구들에게도 열심히 전교했다. 그리하여 막달레나의 모친이 우선 입교하였고 또한 모친은 딸들을 입교시키게 되었다. 한편 서울로 피신해온 막달레나는 교우집을 전전하다가「학다리」에 조그마한 집 한채를 마련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어떤 증인의 말에 의하면 유 빠치피꼬 신부가 이 집을 사주었다고 한다. 여하간 막달레나는 여기서 실을 만들어 팔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결혼했던 언니 발바라도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후 동생한테 와서 서로 의지하여 살게되니 그들의 빈곤한 살림이란 이루 표현키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봉천의 모친도 판공때가 되면 늘 고모와 함께 서울에 와서 성사를 보고서는 딸의 집에서 묵어가곤 하였다. 이해 기해년 봄에도 여느때처럼 모친은 고모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성사를 보고서는 잠시 딸의 집에 들렀다.
때마침 군난이 크게 일어났다. 이때 막달레나의 집에는 김 말다와 김 루시아 두 여교우가 함께 지내고 있었으므로 3모녀와 고모 조카딸과 이 발바라를 합쳐서 도합 7명이 같이 모여 있었다.
많은 교우들이 잡혀가 용감히 신앙을 고백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남 다미아노와 이 아오스닝 두 회장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 가운데 보여준 용기와 불굴의 신앙은 이 용감한 6명의 부인들로 하여금 천주를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치려는 열망을 일으켰다. 그들은 즉석에서 자원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아직도 포졸들이 남아서 파수를 보고있는 남 회장집으로 달려가 자수하였다. 이 발바라는 나이가 어려서 자원의 무리에서 제외된 것 같으나 어쨌든 그도 얼마 안되어 붙잡혔을 것이 확실하다.
포졸들은 어리둥절하여 믿으려 들지않고 도리어 증거물의 제시를 요구했다. 묵주를 꺼내 보이자 그들을 결박하여 먼저 포장의 집으로 끌고갔다. 여기서 주뢰 4차를 하여도 굴복하지 않으므로 포청으로 보냈다. 5일후 포장이 다시 불러내어『이제 옥고를 맛보았으니 후회하는가』라고 물으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우리는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저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결심은 불변합니다. 어서 국법대로 죽여주시오』라고 대답했다. 10일간의 구류끝에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 막달레나는 세번 형신을 거쳐 사형이 선고되었다. 마침내 6월초 10일에 고모 데레사와 한가지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고모의 나이 52세였고 막달레나의 나이는 31세였다. 기해일기는『동정을 보존하고 또 위주치명까지 하여 시작과 마침을 이렇게 하였으니 그 열렬한 신앙과 강용한 행실을 가히 탄복할러라』이렇게 막달레나의 동정이오 순교란 이중적 승리에 탄복해 마지않고 있다.
막달레나의 언니 발바라는 이 해 7월 26일에 그리고 모친 허 막달레나는 8월 19일에 각각 참수치명했다.
발바라는 순교에 앞서 옥중에서 올캐에게 보낸 편지에서 5명의 순교자를 낸 자기 가문의 영광을 자랑하면서『우리 집안은 의심없이 동양에서 첫째가 될것이니 열심수계타가 이후 천국에서 같이 만납시다』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발바라의 올캐 선 막달레나는 자기의 남편을 시켜 허 막달레나 이 발바라 막달레나 3 모녀의 시체를 거두어 자기집 뒤 가족묘지(오늘의 봉천동)에 매장케하였고 동시에 후에 순교한 최 비리버가 그들의 성명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사발에 그들의 성본명을 적어 같이 묻었다. 3모녀의 유해는 오늘날 절두산 지하성당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고 쓰여진 사발은 기념관에 전시되어 그 쓰여진 글씨는 오늘도 선명하여 순례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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